현 정부가 들고 나온 실용주의에 대해서 실용주의는 철학도, 뿌리도 없고 현실적인 일천한 기업경영관의 소산물일 뿐이라고 헐뜯는 인사가 있다. 혹자는 실용주의는 값싼 편의주의로 전락하게 하고, 극단적으로는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이 실용주의 가면을 쓰면 경제적 강도질도 용납될 수밖에 없다고 폄하한다. 과연 그런 것인가.

실용주의는 물론 실상(實狀)을 전제한다. 실상은 현재 있는 그대로의 것이다. 가정 직장 등 주변의 것, 극히 제한된 것들이다. 그리해 제한된 시야에서의 실상, 즉 현실에 대한 판단은 모순에 이르게 하는 수가 있다. 이 때문에 실용주의는 늪에 빠지고 만다는 생각들인 것 같다. 그러나 실상의 본질적 의미는 깊고 깊다. 성경은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라고 하면서 실상은 곧 깊은 믿음임을 가르치고 있다.

시각에 따라 논쟁의 여지는 없지도 않으나 적어도 실용주의 정책은 공허한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시켜서 실제로 실익을 가져오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지와 믿음의 표시인 것이다. 이런 실용주의는 미국에서 실제 선험한 프래그마티즘 같은 것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따른 갈등과 조화의 무늬다. 미국은 남북전쟁의 후유증으로 통합을 위한 지적(知的) 치유가 필요했다. 시기적으로도 독점 자본주의의 문턱에서 혼란한 때였다. 드디어 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은 이 어려운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 오늘날 세계최대의 경제대국을 이룩했다.

청나라 고증학파가 내세운 실사구시(實事求是)는 과학기술 등 근대문명의 가치를 든 학문방법론이면서 정책이념이었다. 이는 공리공론으로부터 현실에 의거한 진리를 찾겠다는 것이다. 이 용어는 사실은 1세기경 후한 때 한서(漢書)의 하간헌왕덕전(河間獻王德傳)에서 '修學好古實事求是'로서 언급된다.

이 사상에 힘입어 등소평은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로 꽁꽁 묶여진 중국을 이른바 '흑묘백묘(黑描白描)'의 실용정책으로 대전환 시킨 바 있다. 조선의 실학(實學)은 17세기 후반부터 전통유학으로 부터 새로운 실용지식에 바탕한 정책 방향을 모색하게 하면서 선각사상을 낳았다. 당시 사회지도자들은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실제적 대안을 찾기 위해 현실적인 제도와 도로, 수레, 주거, 풍속, 문화 등의 개발을 추진했다.

오늘날엔 그간의 과학적 사회주의, 과학적 자본주의를 포함한 독선적인 이데올로기 정치체제를 완화시키는 해독제로서 실용주의가 요구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실용주의자들은 그것은 여러 가치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하는 짐을 지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우리 사회 내에서 가장 부유한 최상위 사람들과 가장 가난한 최하위 사람들 사이의 현격한 불평등에 대한 갈등해소에 있어 소수의 노동조합 지휘자들이 나머지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고 하는 데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 등이다.

'제3의 길'은 사회주의의 독선성, 경직성과 자본주의의 불평등을 극복하려는 새로운 이념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저자 기든스는 사회민주주의의 성공적 복원에 이르는 길을 새롭게 규정하고, 그것은 좌우이념의 적당한 타협이 아니라 변화하는 현실에 필요한 적극적인 치유 방법이라고 논했다.

고매한 철학자 제임스 밀은 영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원했다. 그는 폭력적인 선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금방이라도 민중봉기가 일어날 것처럼 정부에 협박적이었다. 그러나 아들 밀은 서로 다른 것에서 좋은 점을 취해 통합하는 것을 원했다. 어떤 사안도 대립되는 측면이 있게 마련이고, 그런 대립측면의 실상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부분진리야 말로 진리의 한 부분일 따름이라고 여긴 것이다. 우리가 아들 존 밀에게 감동하는 것은 아버지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견해를 껴안고 유연하게 초월했다는데 있다.

지금 우리사회는 진보주의자의 이데올로기(견해)를 보수주의가 귀담아 듣고, 보수주의자의 주장에 진보주의자가 귀를 기울이면 어떤 정치, 경제, 사회적 위기도 유연하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지금 우리사회가 바라는 실용주의다.

김동수 관세사·경영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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