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봉수대 (상)

경주~안동~충주 거쳐 남산 이르는 노선 경부고속도와 흡사

낮엔 연기 밤엔 횃불…비오는 날이면 군사가 뛰어서 연락

▲ 동구 주전동 봉대산에 자리한 주전 봉수대, 울산에 있는 간선봉수대 6곳 중의 하나이다.
해안지역인 울산지역에는 성곽과 봉수대 등 관방시설(關防施設)의 유적과 흔적이 유난히 많다. 울산의 시가지와 해안가에는 산성과 읍성, 병영, 수군만호진영, 봉수대 등의 관방시설의 흔적이 남아있다. 그만큼 외적의 침입이나 출몰이 잦았던 터라 이같은 군사시설을 설치함으로써 대응태세를 갖추어야 했던 곳이다.

하지만 이들 관방시설 가운데 온전히 보존된 유적은 별로 없다. 울산의 태화강 유역과 동해안변에 설치돼 울산의 선조들을 외적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낸 울산의 관방시설에 대해 알아본다.

조선시대 울산지역에도 불과 연기를 이용해서 지역의 상황을 주고받는 봉수대(烽燧臺)가 곳곳에 설치됐다. 봉수대는 전망 좋은 산꼭대기나 산등성이에 설치돼 밤에는 불꽃이 잘 보이는 횃불을 올리고, 낮에는 연기를 피워 중앙 또는 변경에서 발생한 급보를 전했다.

이 봉수대는 19세기말 개화의 물결로 근대적 통신수단인 전신·전화가 설치되면서 쓰임새를 다해 용도 폐기됐지만, 삼국시대부터 2000여년간 우리나라 최고의 통신수단으로, 변방이나 연안의 상황을 중앙정부에 연결하는 ‘핫라인’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전국의 봉수망은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설치된 중앙 봉수인 경봉수(京烽燧)를 축으로, 국경선이나 바닷가 근처의 최일선에 설치된 연변봉수(沿邊烽燧)와 전국에 그물망처럼 설치된 내지봉수(內地烽燧)가 모두 수도 한양의 경봉수에 연결되는 체계로 짜여졌다.

전국의 봉수(내지봉수)는 총 5개의 직봉 노선이 설치·운용됐다. 함경도 경흥~강원도~경기도로 연결되는 제1로(路), 동남권(부산·경남 동부·울산) 상황을 경북을 거쳐 충북~경기도로 연결되는 제2로, 평안도 강계~황해도~경기도로 연결되는 제3로, 평안도 의주~황해도 서해안~경기도로 열결되는 제4로, 전남 순천~전북해안~충남~경기 강화도 해안에 이르는 제5로의 봉수노선이 있었다.

전국에 총 623곳에 설치돼 그물망처럼 상호 연결 신호체계를 구축했다. 직선봉수는 대략 30리(12km)마다 설치됐다.울산과 부산, 경남권에서 사건 발생시 수도로 전달하는 제2로는 오늘날 경부고속도로, 호남지역의 제4로는 서해안고속도로와 비슷한 노선이다. 역할과 위치는 오늘날 전파 중계소와 매우 흡사하다.

울산과 부산· 동부 경남 일원의 동해남부 지역에는 부산을 시작점으로 총 124곳(직봉 34곳, 간봉 90곳)의 봉수대가 설치됐다. 직선봉수(직봉)는 서울까지 곧바로 이어주는 주 봉수로로, 오늘날 고속도로와 비슷한 역할을 하며, 간선봉수(간봉)는 각 지방의 군사 정보를 직선봉수로 알리는 직선봉수의 보조선로격으로 오늘날 지방도로와 역할이 비슷하다.

울산지역에는 총 8개의 봉수대(주봉 2곳, 간봉 6곳)가 설치·운용됐다.

울산과 부산, 경남 동부해안의 상황을 수도로 연결하는 동남권의 주봉(主烽)은 부산 다대포진에서 처음 횃불이 오르면 다대포의 구봉~부산진의 황령산~동래의 계명산~양산의 위산~울산 삼남의 부로산(夫老山)~울산 두서의 소산(所山)봉수대를 거쳐 경주 고위산~안동~ 충주~남산에 이르도록 설치·운영됐다.

이들 주봉에다 울산을 비롯한 동해남부지역의 상황을 전달하는 간봉망(間烽網)은 훨씬 더 많이 설치됐다. 간봉은 부산진의 황령산을 시작으로 동래의 간비오산~기장의 남산~장안읍의 임량포와 아리포~울주 서생면의 이길곶~하산~가리~천내~남목천~유포간봉을 지나 경주 양남의 하서지(下西知)~경주 독산(禿山), 포항 장기의 복길~뇌성산~영일~흥해~안동까지 이어졌다.

울산의 간봉은 울주군 서생면 나사리 산 36(해발 121.2m)에 위치한 이길봉수대를 비롯해 울주군 온산읍 강양리 산66 (해발 132m) 정상의 하산봉수대(울산시 기념물 36호), 남구 남화동 봉화산(해발129.1m)의 가리봉수대, 동구 화정동 산 160-2 봉화산(해발 120m)의 천내봉수대, 동구 주전동 198 일원 봉대산(해발 183m)에 자리한 주전 봉수대, 북구 당사동 230 우가산(해발 173.5m)에 있는 유포봉수대 등이다.

봉화의 신호는 밤에는 불(烽)을, 낮에는 연기(燧)를 이용했다. 홰(炬)의 수(數), 즉 횃불의 개수로 상황을 전달했다. 봉화를 올릴때는 주로 소똥이나 말똥을 구해서 불과 연기를 피웠다. <경국대전>에 기록된 봉수의 신호방법은 5가지.

즉 왜적이 울산 앞바다에 출현하면 평상시 1개이던 횃불이 2개로 늘어났다. 적이 해안에 접근하면 3홰, 적이 국경을 침범(내지)하거나 적선과 교전중(해안)이면 4홰, 적군과 접전(내지) 또는 적이 육지에 상륙(해안)하면 횃불 5홰를 올렸다. 비나 궂은 날씨로 신호가 불가능하면 봉수대를 지키던 군사가 뛰어가서 다음 봉수대에 알렸다.

조선시대 변방인 함경도에서 봉화를 올리면 중앙까지 도달하는 시간이 대략 5~6시간(시간당 100㎞ 이상)이 걸렸다고 기록된 점으로 보아 울산 주전 앞바다에 왜적이 나타난 것을 초병이 제대로 감지했을 경우 조정에서는 약 4시간후에 급보를 받아볼 정도로 놀라운 신속성을 갖추었던 셈이다.

하지만 울산의 봉수대와 관련된 고문서는 대부분 사라지고 없고, 주전 봉수대와 관련한 고문서 11점이 유일하게 보존돼 있을 뿐이다. 이 고문서에는 별장과 인근 동수에게 근무를 철저히 하고 군포를 잘 징수하라는 전령문, 봉수대에 비치됐던 각종 병기와 도구 등의 물목표까지 자세히 기록돼 있다. 철종9년(1858년)~고종 33년(1896년)에 발간된 것들이다.

고문서에는 울산부사가 주전 봉수대의 마지막 별장이었던 박춘복, 박명대 부자에게 내린 별장 임명장을 비롯해 미포·정자 등 봉수대 인근 마을 주민들에게 군량 형식으로 거둔 금전의 내역, 울산부에서 주전봉수대에 내려준 조총 등 무기와 장비의 목록, 별장이 이를 점검해 이상 유무를 보고한 문서까지 포함돼 있어 조선 후기 봉수대의 운영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고 있다.

울산에는 이처럼 우리고장의 안녕과 평안을 가져다 준 봉수대가 곳곳에 위치해 있지만, 불행히도 아직 제대로 복원·발굴되지 못한채 방치돼 있다. 봉수대가 인적이 드문 산꼭대기나 산등성이에 설치돼 접근성이 떨어지더라도 우리가 지켜야할 소중한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없다.

김창식기자 goodg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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