탤런트 최진실의 자살

개인사 넘은 사회문제

소통의 귀함 깨닫기를

▲ 이영식 수필가
탤런트 안재환이 가더니 뒤이어 최진실도 갔다. 한 달도 채 안된 사이에 일어난 자살사건들을 두고 세상이 떠들썩하다. 최진실의 죽음을 두고 어떤 이는 사채가 원인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사이버 공간의 헛소문 때문이라고도 했으며, 또 이혼이 그 원인이라고도 했다. 아무튼 이런 저런 원인이 우울증으로 변해 통제력을 잃고 선택할 수도 없고 가서는 안될 길을 가고 말았다.

통계에 의하면 1년에 1만3000여명이 자살을 한다고 하니, 우리나라가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옳지 못한 행위이다.

하지만 자살이 오직 개인에게만 책임이 있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국가와, 생명의 소중함을 올바르게 교육해야 할 교육당국과, 인간을 천국으로 인도한다는 그 많은 종교는 다 무엇을 했으며, 가족과 이웃은 어디에 있었는가. 죽은 자는 우울증 환자이고, 살아있는 우리는 무관심증 환자라고 불려야 옳을 것 같다.

죽는다는 것은 생명의 끝이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자가 죽음에 앞서 천당과 지옥이 사필귀정으로 따라오는 지 의문을 가졌다. 그래서 종교에서 말하는 구원의 정의를 알고 싶어 목사님, 스님, 신부님께 전화를 걸어 “자살자가 구원천당과 극락받을 수 있습니까?”하고 물었다. 세 분의 대답은 “구원받지 못한다”였다. 그 이유는 스스로 생명을 끊는 행위도 살인으로 봐야 한다고 단호하게 일러주었다. 그리고 인간이 지을 수 있는 죄 중에 가장 큰 죄가 살인죄라고 덧붙였다.

종교에서는 마지막 영혼을 거두어 그가 살았을 때의 행실대로 상벌을 준다는 정설이 있다. 그렇다면 인간의 구원을 책임져야 하는 신앙인들이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라도 내 이웃에 끊임없는 관심을 베풀어야 하지 않을까.

소중한 관심의 결과로 단 한 사람이라도 자살을 막고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보람 있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나라는 종교도 많고 등록된 신자도 많다. 국민보다 그 수가 훨씬 많다고 하니 아마 예방적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자살자 중에 80%가 우울증 환자라고 한다. 심리적 요인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주의가 그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오는 자아상실감이 원인이라고 한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은 그것이 자기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이나 주변이웃에까지 심각한 영향을 준다는 데 있다.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나게 돼 타인까지 연쇄살인을 시키는 무서운 악의 결과로 이어진다.

중요한 것은 우울증 환자들 대부분이 가족이나 친구, 이웃과의 소통부재로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다.

제발 생명을 지키고 보호해야 할 주체가 제 역할을 잘해서 가족 간의 소통, 이웃 간의 소통, 사회와 소통하는 생활을 다져 나가야 하겠다.

나만의 삶의 철학을 세운다면 남을 의식하거나 타인의 삶을 부러워하는 집착의 삶은 살지 않을 것이다.

불우한 장애인들이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현장에서 단 한 시간이라도 봉사하는 삶을 살아보면 어떨까도 생각해본다. 동굴 속에 자기보다 더 불편한 거지 10여명을 눕혀놓고 밥을 얻어다 보살핀 장애인의 죽음을 지켜 본 어느 성직자의 말이 새삼 떠오른다. 죽음 앞에서도 행복한 표정의 그는 진정 천사의 모습이었다고.

진실은 갔다. 그러나 그가 가면서 우리에게 남겨준 것도 있다. 오는 진실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고귀함을 일깨우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야 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가족과 이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어서라는 것이다.

이영식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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