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두서 내와마을(하)

▲ 내와분교 제7회 졸업기념 사진. 양철지붕과 송진을 칠한 송판을 벽에 붙인 학교는 유년시절 추억의 중심자리였다.
유년의 기억창고 초등학교 학생 수 감소로 폐교

시민들의 숲체험장으로 생태환경지킴이 대변신

빛바랜 졸업사진 속 아련한 얼굴 벌써 반백 넘어

우리 마을은 보통 내와라고 불리지만 사실은 내와, 외와, 중점, 숲마을, 탑골 등 다섯 개의 자연 마을로 구성되어 있다. 나는 외와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는데 초등학교가 집 곁에 있어서 무척이나 행복했다. 내 어릴 적 내와초등학교는 양철지붕에 건물 벽은 송진기름을 먹인 긴 소나무 판자를 덧댄 허름한 목조건물이었지만 다섯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공부를 하면서 꿈을 키우고, 운동과 놀이로 몸을 단련하던 도량(道場)이었다. 또 마을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러내던 소중한 공간으로 내 유년시절의 추억의 중심자리였다.

선친(先親)에게 들은 바로는 내가 태어나던 1954년에 선친과 옆집에 살았던 외조부를 비롯한 마을의 몇몇 유지(有志)들이 뜻을 모아 학교 부지(敷地)를 기증하여 학교가 세워졌다고 했다. 하지만 학생 수의 급격한 감소로 1999년 폐교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학교가 영영 사라지지 않고 울산숲자연학교로 번듯이 탈바꿈하여 울산의 많은 학생들과 시민들이 숲체험을 통해서 생태환경지킴이가 되고자 찾아오는 연수(硏修) 장소로 존립하고 있으니 작은 산골마을로 봐서는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초등학교 시절 제일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학교 수업이다. 학생이 몇 명 안 되는 작은 분교(分校)인지라 두 학년의 학생들이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하는 이른바 복식수업(複式授業)을 했다. 선생님이 시간을 쪼개어 학년별로 수업을 참 잘 해 주셨다. 그 당시 교통이 불편한 오지(奧地) 학교에 부임(赴任)해 오셔서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철부지 아이들을 열정으로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께 무한 감사를 드린다.

▲ 내와분교 모습. 지금은 울산숲자연학교로 바뀌어 숲체험을 통한 생태환경 연수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내가 초등학교 공부의 기초가 잘 닦여져 외지의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그리 큰 어려움 없이 공부를 잘 할 수 있었던 것도, 또 30년 넘게 교사로서 또 교장으로서 교직생활을 잘 영위하고 있는 것도 실은 유년 시절 그 분들의 애정이 담뿍 담긴 가르침 덕분이라 생각이 든다.

어린 시절 친구들과 즐기던 놀이로는 주로 딱지치기, 팽이치기, 자치기, 비석치기 등이었지만 겨울철 동네 앞 개울물이나 뒤뜰 무논이 꽁꽁 얼었을 때 손이 벌겋게 부르터 가면서 지치던 앉은뱅이 스케이트는 정말 재미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경기도 가끔 했었는데 요즘처럼 정식 축구공을 차본 일은 아예 없고 작은 고무공이나 새끼를 둘둘 말아 만든 공으로 축구를 한답시고 골대도 없는 운동장에서 공을 따라서 이 구석 저 구석 몰려다니곤 했다.

놀이 중에서 제일 신나는 놀이는 학년 대항 또는 마을 대항전으로 벌어진 회전놀이였다. 회전(會戰)놀이는 운동장에 큰 성(城)을 선으로 그어 놓고 적군(敵軍)이 당기거나 밀치는 방해를 피해 성 옆의 좁은 길을 금을 밟지 않고 통과해 가는 일종의 전쟁놀이였다. 힘과 민첩성을 갖추고 또 달리기를 잘 해야만 이길 수 있는 경기여서 남자아이들에겐 정말 신나는 놀이였다.

학교 밖 추억꺼리로는 단연 소를 먹이러 가는 일이었다. 소를 산에 풀어 놓고 난 뒤에 노는 장소로는 산중에 흔히 있는 묘터가 제격이었다. 거기서 씨름이나 닭싸움놀이를 하다가 지치면 계곡의 소(沼)에서 멱을 감곤 했는데 가끔 놀이가 싸움으로 번지면 힘 약한 친구들은 오후 내내 징징거리며 울고불고했다.

소먹이 놀이의 백미(白眉)는 묵찌빠 놀이였다. 소먹이는 친구들이 한자리에 일렬로 앉아 묵찌빠 놀이를 했다. 끝가지 이긴 사람은 왕이 되고 진 사람들은 모두 부하가 되어 왕의 명(命)을 받들어야 했다. 왕의 명령은 주로 먹거리를 만들라고 시키는 일이었다. 반듯한 돌을 구해 진흙을 발라 솥을 만든 후 집에서 가져온 감자나 고구마를 넣고 불을 지펴 구워먹기도 하고 또 여름에는 밀살이를 가을에는 콩을 서리해 와서 콩살이를 해 먹었는데 입에 착착 감기는 그 고소한 맛은 형용(形容)할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배고픈 유년 시절의 긴 여름날 오후를 나름대로 잘 보낼 수 있었던 방편이기도 하다.

그런데 아무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은 아찔한 놀이가 하나 있다. 그 당시 우리 마을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에는 석유 등잔 호롱불을 켜고 살았다. 집집 마다 석유를 담은 큰 병을 방 한구석에 필수품으로 비치해 두고 있었다. 하루는 고개 너머 내와에 사는 친구 집에서 밤새 놀았는데 그 친구가 석유를 한 입 가득 물고는 성냥개비에 불을 붙인 후 그 불꽃을 향해서 석유를 후욱 뿜어대었다. 그러자 커다란 불꽃이 방안 천장을 향해서 훨훨 치솟아 올랐고 철없던 우리들은 신이 나서 탄성을 질러대곤 했다. 요즘 큰 행사 전야의 불꽃놀이보다 훨씬 더 재미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너도 나도 석유를 입에 가득 물고는 경쟁하듯이 큰 불꽃을 확확 뿜어 대었는데 아뿔싸 그 추운 겨울 밤 누군가가 분 불꽃이 빗자루를 만들려고 시렁에 매달아 놓았던 수숫대와 이불에 옮겨 붙어 천정까지 까맣게 태워버렸다. 우리 모두는 그 불을 끈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불이 지붕으로 옮겨 붙어 집을 태우지 않았던 것은 정말 신의 보살핌 때문이었던 게다.

돌이켜보니 초등학교를 졸업한지가 어언 40년도 훨씬 넘었다. 그 당시에는 대부분 친구들은 초등학교가 생의 마지막 학교였고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설움 그 자체가 자극제가 되어 졸업식장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졸업 앨범도 따로 없이 봉계장터에 사는 사진사가 학교에 와서 졸업사진 몇 장 찍는 것으로 졸업 기념을 대신 했다.

▲ 김익근 범서고 교장

안타깝게도 그 빛바랜 졸업사진 속에 내 얼굴은 찾을 수 없다. 중학교 진학시험을 치러 부산으로 간 사이에 졸업사진을 찍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사진 속의 순수한 아이들은 이미 반백이 넘어 머리가 희끗한 초로(初老)의 얼굴들로 변해버렸다. 다가오는 봄 햇살 좋은날, 고향 마을에서 모두 만나 한잔 술에 옛 일 얘기하며 한바탕 웃고 싶다.

김익근 범서고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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