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삶·지혜 담긴 옹기- 숨쉬는 그릇 옹기의 역사

▲ 1900년대 옹기장수
BC 6000년경 신석기시대 저장도구로 사용하기 시작

철기시대 중국의 ‘흑도’ 한국 옹기의 기원으로 분석돼

삼국·고려시대 거쳐 조선시대 필수 생활용기로 정착

옹기(甕器)는 자연으로부터 흙과 물·불·바람을 빌려와 만든 가장 한국적인 정서가 담긴 그릇이다. 곡식과 식수를 저장하는 한민족만이 가지는 독특한 음식 저장 용기이다. 예부터 김치나 간장, 된장, 고추장, 술 등을 음식을 발효시켜 즐겨 먹는 한민족의 음식문화 습성이 옹기 태동의 배경이 됐다.

옹기류는 그 제조방법에 따라 질그릇과 오지그릇, 푸레독, 오지, 반옹기, 옹기 등으로 불려지고 있지만 이 가운데 옹기가 생활용품의 대부분을 차지해 옹기라고 통칭하고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옹기는 우리나라 산야에서 유색토(찰흙)를 소재로해서 식품성이 함유된 약토에 식물성 재를 물과 함께 개어서 잿물로 만든 뒤 이를 적당한 수분이 함유된 상태에서 그릇의 안과 밖에 옷을 입힌 뒤 1200℃ 내외의 고온에서 10일 동안 구워낸 그릇이다.

▲ 안악3호분 <우물가>

또 약토 잿물을 입히지 않고 진흙만으로 600∼700℃ 내외에서 소성해 연막을 입힌 검은 회색의 투박한게 질그릇이며, 질그릇과 같은 방법으로 검댕이를 입혀서 구운 뒤 소금을 뿌려 넣어서 많은 고강도의 그릇이 쌀통·콩나물시루 등으로 사용하는 푸레독이다. 백토에 잿물(광물성·화확성물질)을 입혀서 두벌구이를 한 게 오리그릇이요, 푸레독과 같이 소금을 쳐서 만든 고강도·고품질의 그릇이 반옹기다.

■옹기의 역사

우리 민족이 언제부터 옹기(토기)를 사용했는지 정확히는 알수 없지만, 농경의 시작과 더불어 씨앗과 음식 저장의 필요성이 요구되던 기원전 6000여년 전 신석기 시대의 빗살무늬토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게 민속학계의 보편적인 통설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땅을 판 구덩이에서 별다른 특별한 시설없이 장작불을 피워 섭씨 600~700°C 의 열을 가해 질그릇을 만들었다. 청동기시대에 접어들면서 각지에서 다양한 모습의 무늬없는 토기, 즉 민무늬토기가 널리 사용됐다.

이 민무늬토기도 BC 300년 경부터 파급되기 시작한 철기문화와 함께 점차 소멸하고 점차 노천가마에서 열을 1000 ∼1200 ℃의 고화도(高火度)로 높여 만든 경질회색토기가 유행하게 된다. 초기 철기시대인 원삼국시대 이후께 부터 환원번조인 회색경질토기가 널리 제작됐다.

▲ 김홍도의 <우물가>

학계는 한국의 옹기는 철기시대 중국에서 채문토기에 이어 나타난 흑색토기인 흑도(黑陶)에서 연원을 찾고 있다. 이 와질토기가 한반도로 전해져 기원전 1세기부터 4세기경에는 고화도의 석기로 발전하고, 이 석기류 중 한 갈래는 청자­백자로 이어지고, 나머지 한 갈래가 옹기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5~6세기경 신라와 가야시대에는 섭씨 1200℃의 높은 온도로 환원소생해 매우 우수한 석기가 제작됐다.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는 고열에서 만든 적색토기(석기)를 제작해 술 빚는 용기, 소 여물통, 저장용기 등으로 활용됐다. 고려시대에는 이 보다 더 단단한 질그릇 등 생활용기로 폭넓게 사용됐고, 조선시대에는 오지그릇이 널리 통용됐다.

삼국시대로 접어들면 옹기를 저장·발효용기로 사용했다는 기록이 많이 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고구려조’에는 ‘집집마다 작은 창고를 갖추고 있는데 이를 부경(浮京)이라 불렀다. 고구려 사람들은 매우 청결하며 잘 저장하고 발효된 식품을 만들어 먹기를 좋아한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 부경시설은 고구려 세력의 영향권이었던 경북 봉화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 신윤복의 <주사거배>

<삼국사기>에는 백제 2대 다루왕 11년 ‘가을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에게 술 빚는 것을 금하게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또 신라 제31대 신문왕조에 ‘왕비를 맞이하는 왕이 신부 집에 쌀, 술, 기름, 꿀, 간장, 포, 젓갈 등을 적은 명세서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음식을 저장하고 발효시키는 데 옹기를 사용했음을 알수 있다.

신라 31대 신문왕 때는 통일신라시대 도기류를 생산하는 기관인 와기전(瓦器典)을 설치, 간(干) 1인과 사(史) 6인의 소속관원을 두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가차원에서 옹기를 체계적으로 제작했음으로 알수 있다.

중국 송나라의 문신 서긍이 1123년(인종 1) 고려에 사신으로 들어왔다가 귀국한 뒤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는 ‘고려인들은 옹기를 갖다놓고 식수를 저장했는데, 이 옹기의 규모는 높이 6자, 너비 4자5치, 용량은 3섬2대에 달했다’고 기록했다. 고려시대에는 매우 큰 용기를 제작, 실생활에 사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의 옹기에 대한 자료는 매우 풍부하다. 조선시대의 모든 수공업은 원칙적으로 국가에서 경영했다. 때문에 옹기류도 정기적으로 일정한 기간을 중앙과 지방의 국가 기관에서 작업하고 남는 기간에 생계를 위한 작업을 했다. 그만큼 조선시대 옹기는 일상생활에서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질그릇이었던 셈이다.

조선초기 <경국대전)에 따르면 사기를 제작하던 사기장(沙器匠)은 중앙의 사옹원에 380명, 지방의 각 군현에 공식적으로 99명이 각 소속되었으나, 조선 후기에는 경기 광주의 분원(分院)에 소속된 인원만 552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조선 후기에는 옹기제작도 모양을 만드는 조기장, 건조를 맡은 건화장, 흙을 반죽하는 연장, 유약의 배합을 맡은 연정, 유약을 바르는 양수장, 제품의 선별을 맡은 파기장 등으로 철저히 분업화·세분화됐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경상도 초계군과 진주목에 황옹(黃甕)만을 굽는 가마가 3군데 있었다. 황옹은 현재 항아리 단지와 같은 규모로 당시에 이같은 것들이 많이 생산된 것으로 분석된다.

옹기가 임진왜란 이후 더욱 발전했다는 기록은 조선 순조 때의 실학자 서유구 저술한 <임원경제지>에서 확인된다. 서유구는 조선후기 옹기가 일상생활에 가장 요긴하게 쓰이는 큰 질그릇이며 그 쓰임새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적시하고 있다. 또 순조 9년(1809년) 빙허각(憑虛閣) 이씨(李氏)도 부녀자를 위해 엮은 <규합총서>에서 발효음식의 제조방법과 올바른 옹기의 사용방법까지 소개하고 있다. 순조 18년(1818년)에 정약용이 저술한 <목민심서>에도 흙으로 빚은 옹기들이 명확히 분류돼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제작해 사용한 것을 추정되는 옹기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가정에서 없어선안되는 필수 생활용기로 자리잡았다. 수천년의 영화를 누렸던 옹기산업도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이후 1960~1970년대 초까지 번성기를 누렸다가 김치냉장고 등 대체용기 보급으로 점차 실생활에서 멀어지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됐다.

김창식기자 goodgo@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