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 관방시설 - 1. 비치물목 통해 본 봉수대 운영상

▲ 편전(해남우수영관광지전시관내)
봉수대 유적 전국 600~700곳

대부분 1990년대 들어서 복원

연대(烟臺)만 단편적으로 정비

전체 구조·운영상 이해 어려워

물품 기록 ‘남목봉수별장서목’

조선조 지리서 등 중요한 자료

■ 봉수대 비치물목들

울산은 삼국시대 이래육지와 해안으로부터 적이 침입하는 최전선이었다.

때문에 적을 막기 위한 관방시설(關防施設)이 다른 지역보다 유난히 많은 고장이다.

육지에는 관문성, 기박산성이 해안가에는 개운포영성, 염포영성, 사포진성, 서생포구순만호진성 등의 해군기지가 설치됐다.

▲ 환도(해남우수영관광지전시관내)

또 지역의 군사정보를 중앙에 전달하는 봉수대(烽燧臺)도 해안변을 따라 설치됐다.

이들 관방시설은 보존상태도 매우 우수해 역사문화자산으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울산과학대학 이철영 교수 등 전문가들을 통해 울산지역에 산재한 관방시설의 역사적 의미와 보존방안 등을

재조명해 본다.

▲ 화전(해남우수영관광지전시관내)

조선시대 전국적으로 설치·운영된 봉수대의 총수는 시기적으로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 600~700여개나 된다. 관방문화 유적 가운데 약 3000여 곳이나 되는 성곽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하지만 대다수 봉수대는 고종 31년(1894) 근대적인 전화통신의 등장에 의한 봉수제 폐지로 훼철되었고 오늘날까지 온전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

현재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봉수대 유적은 대개 1990년대 이후 새롭게 복원한 것들이다. 복원된 봉수대의 경우 원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점도 문제지만 정비범위에 있어 시설 전체가 아니라 불이나 연기를 올리던 연대(烟臺)만을 단편적으로 복원해 놓았기 때문에 이것만 가지고는 조선시대 봉수대의 전체적인 구조나 운영 상황을 이해하기란 사실상 어렵다.

당시 봉수대의 모습이나 운영 방법, 봉수군의 생활상 등은 문헌자료와 최근의 발굴조사 결과 등을 함께 살펴보아야 추정이 가능하다. 특히 조선시대 발간된 각종 지리서와 울산에서 발견된 <남목봉수별장서목>(시 문화재자료 제16호) 중 봉수대의 비치 물품에 대한 기록은 봉수대의 운영 실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 호고(거제옥포대첩기념관)

지금까지 울산의 남목봉수와 부로산봉수, 양산 위천봉수 등 총 10개소의 봉수에 관한 비치물목(備置物目)이 확인되고 있는데 그 내용은 대동소이한 편이다.

비치물목에는 약 80종 내외의 각종 물품과 시설에 대한 수량·단위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용도별로 분류해 보면 거화시설 및 재료 약 35종, 방호시설 및 무기 약 26종, 생활시설 및 비품 약 23종이다.

먼저 거화재료로는 싸리나무(杻), 관솔, 삼(麻), 쑥, 풀 외에 말이나 소의 똥 등 주변에서 흔희 구할 수 있는 모든 재료가 사용되었다. 탄(炭), 회(灰), 당겨(粗糖), 가는 모래(細沙) 등은 주간의 연기에 의한 거화시 연기가 바람에 흐트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위의 거화재료에 섞어 사용하던 보조재료였다. 이외에도 거화재료에 불을 붙이기 위한 부싯돌(化石), 부쇠(火鐵) 등의 발화용 도구와 연대(烟臺), 연굴(烟窟), 화덕(火德) 등의 거화시설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화살(火箭·唐火箭·唐大箭), 깃발(大白旗·五色標旗·五方神旗), 북, 징, 뿔나팔(戰角) 등과 같은 별도의 신호전달비품도 비치하였다. 이것은 횃불과 연기에 의한 신호전달이 여의치 않을시 청각과 시각에 의지하여 인근 봉수대에 신호를 보내기 위한 보조용 신호수단이었다.

방호시설이나 무기는 군사통신시설인 봉수대의 자체 방호(防護)나 방화(防火)에 필요한 각종 비품 및 무기를 말한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철갑옷, 머리가리개(俺頭), 방패 등의 개인방호비품과 활(弓子), 화살(長箭·片箭), 조총(鳥銃), 삼혈총(三穴銃), 창(短槍·長槍), 고리칼(還刀), 낫(鎌子), 도끼(斧) 등의 각종 무기류이다.

이외에도 방호용 투석도구인 몽돌(水磨石), 방화비품인 멸화기(滅火器), 말목, 밧줄, 사다리, 활집(弓家) 등 용도별로 많은 비품을 갖추고 있었다.

봉수군의 생활시설 및 비품으로는 비상시를 대비하여 봉수마다 1섬에서 10섬까지 비축하고 있었던 쌀 외에 밥솥(食鼎), 가마솥(釜子), 수저(匙子), 사발, 접시 등의 취사비품과 물통(水曹), 물독(水瓮), 표주박(瓢子) 등의 음수용 비품 및 난방을 위한 화로(爐口) 등이다. 또한 봉수대에는 봉수군이 풍우를 피하고 숙식을 하기 위해 기와집(瓦家)이나 초가집(草家) 형태의 거주용 건물을 마련하고 거화재료나 다량의 비치물품을 보관하기 위한 곳집(庫舍)이나 임시가옥(假家) 등의 시설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서 수저, 사발, 표주박, 물독 등의 개인 생활비품의 단위가 5인 점을 감안하면 당시 봉수대에 상주하면서 근무를 섰던 실제적인 봉수군의 인원은 5명 정도였던 것으로 해석된다.

이처럼 조선시대 봉수대에는 다종다양한 각종 물품과 시설이 비치되어 있었기에 봉수군이 거화와 경계라는 본연의 임무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국내에는 봉수대의 비치물품을 체계적으로 전시하고 있는 박물관이나 전문 자료관이 없어 아쉬움이 크다.

전국의 지자체 중 경남 다음으로 많은 수의 봉수(6개)를 문화재로 지정·관리하고 있는 우리 울산이 가장 먼저 특화된 봉수전문 교육전시시설을 만듦으로써 호국정신을 일깨우는 역사문화도시로 자리매김 하기를 기대해 본다.

▲ 이철영 울산과학대학 공간디자인학부 교수

울산에 특화된 봉수전문 교육전시실 만들어 역사문화도시 자리매김 했으면...

이철영 울산과학대학 공간디자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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