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성(상)

▲ 동구 주전동 성골의 구마성 유적
방어진은 겨울에 따뜻한 반도형 지형 목장 최적지

주전 성골~염포 심천골 계곡따라 구마성 분포 추정

구마성 유적 대부분 훼손 정확한 규모 가늠 어려워

예부터 나라의 부(富)를 물으면 말의 숫자로 대답할 정도로 마정(馬政)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는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였다. 그것은 과거에는 군의 기병대와 같은 군사적 필요뿐만 아니라 파발마로서의 교통·통신 수단으로서도 매우 중요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악이 많은 지형적인 특수성으로 인하여 농사와 운반수단으로서도 말은 매우 중요하였다. 또한 중국에 해마다 말을 공물로 바쳤고, 신하들의 공적인 노력에 대한 보답으로 국가에서는 말을 상으로 내렸다. 마필과 관련된 마정(馬政)은 국가를 운영하는 일중에서 가장 중요한 업무였던 셈이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말과 관련하여 중국에 해마다 말을 공물로 바친 기록은 매우 많다. 공민왕 23년부터 세종 11년까지 55년 동안의 기록을 살펴보면 약 9만필의 마필을 중국과 교역하였다. 매년 평균 1636필의 마필을 교역한 것이다.

공민왕 23년에서 공양왕 3년까지는 약 3만필, 조선 태조 원년에서 세종 11년까지는 약 6만 필의 마필을 교역하였다. 정상적으로 중국과의 외교가 수립되기 전인 공민왕 18년부터 태종 3년까지는 약 5만 필이 교역되고 그 후 정상적인 외교기반이 마련되기까지인 태종 3년에서 세종 11년까지는 약 4만필이 교역되었다. 마필 교역에 대한 대가로 우리나라는 중국으로부터 비단과 한약제 등을 수입했다. 마필의 교역이 나라 전체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은 매우 큰 것이었다.

▲ 구마성이 있는 염포동 심천골 전경.

중국과의 마필 교역은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볼 때 큰 부담이 됐다. 당시 민간에서 말을 기르고 보살피는 보마법(保馬法)이 형성되어 있지 않아서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마필의 공급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전국의 각 목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날씨가 좋아 농업 생산량이 많은 곳일지라도 농업 생산력의 차질을 감수하고 물과 풀이 풍성한 곳에 목장을 설치·운영하였다. 또한 겨울철 마필의 사료로 많은 양의 콩과 사료용 풀이 필요한 탓에 국영 목장의 운영을 통한 마필의 관리는 국가 경제적으로도 많은 부담이 따르는 것이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담으로 조선시대 중기 이후에는 각 읍에서 책임지고 마필(2~3필)을 관리 생산하도록 하는 각읍분양착급마(各邑分讓着給馬)라는 제도를 도입하는 등 국가적으로는 효율적인 마정 운영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전국의 각 읍은 마필관리와 관련된 전문적인 기술도 없었고, 마필관리에 소요되는 경비가 많아서 마필관리에 좋은 효과를 거둘 수 없었다. 이후 국가에서는 마필관리와 관련된 제반 경비를 부담하는 제도로 바뀌기도 하였다. 이것은 당시 마필관리가 국가적인 차원에서 얼마나 중요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 신라시대 때 울산목장 운영 가능성 높아

▲ 동구 염포동 심천골 구마성 유적.
울산의 방어진은 이러한 여러 가지 정책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목장이 계속 운영된 곳이다. 구체적인 시기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문헌적 사료로 볼 때 1450년 전후의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울산의 방어진은 반도형의 지형을 갖고 있으며 제주도와 전라도 연안과 더불어 겨울이 따뜻한 곳이다. 이러한 지역적인 특수성으로 볼 때 이미 오래전부터 목장이 설치 운영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신라의 경우 진평왕 6년 3월에 이미 승부(乘府)라는 관청을 두어 국가차원의 목장관리를 하였다. 그리고 삼국사기 문무왕 9년 5월조에도 국가 관리의 목장 22개소와 관청소속 10개소의 목장 및 삼국을 통일한 태대각간 김유신의 개인소유 6개의 목장을 비롯하여 국영과 사설 개인목장을 포함하여 모두 174개소의 목장을 운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포항 장기의 경우는 <해동지도 장기부>에 신라 때부터 목장을 운영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때문에 포항 장기지역은 신라 국영 목장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울산 방어진의 경우 포항 장기보다 경주와의 접근성이 더 좋고 따뜻한 기후와 삼면이 바다로 이루어진 반도형의 지형을 갖고 있어 신라 때부터 목장이 운영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울산에서는 기원전 3~4세기경의 스키타이계 청동 매장 문화재가 다른 지역에 비하여 많이 발굴되고 있다.

스키타이계 매장문화재는 최초로 전쟁에서 기마전술을 사용하여 중국을 위협한 흉노족과 연관이 많다. 울산에서 이같은 문화재가 많이 발굴되고 있는 것은 오래전에 이들에 의해서 북방계의 말도 함께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정황에서 울산은 예부터 말과 인연이 많은 도시이었고, 신라 때부터 목장이 설치 운영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함께 울산군의 남쪽 이길곶에 목장을 설치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이길곶은 지금의 서생면 대송리의 간절곶 등대 일대로 추정되는 곳이다. 하지만 이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국가적인 필요에 의하여 목장을 설치하였다가 여건상 운영되지 못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울산에는 방어진 외에도 몇 개의 목장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구마성 전문적인 학술조사 필요

울산 방어진의 구마성 유적은 현재 구체적인 영역과 마성에 대한 연구 조사 보고서가 없는 실정이다. 현재 구마성 유적에 대한 답사를 마쳤지만, 전문적인 조사·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정확한 건설 연대를 단정하기도 어렵다. 다만 문헌적 자료를 통하여 보았을 때 1450년 전후에 설치 운영되었을 것으로 비정된다. 방어진의 구마성은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의하면 ‘군동 적진리의 마골산(麻骨山) 일대로 추증되는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

필자가 수차례 답사를 한 결과 구마성 유적은 주전의 성골 부분에서 염포동 심천골 계곡의 능선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다. 이로 미뤄 주전의 성골 부분과 염포동의 심천골을 잇는 지역이 구 마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목장의 규모는 둘레가 약 46리라는 기록으로 보아서 현재 정보과학고등학교 뒤편에 현존하는 신마성보다 약 2배 정도의 컸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주전의 성골과 염포동 사이의 산마루를 넘어 이어진 마성 유적을 찾지는 못하였다. 당시 마성의 축성 방법의 문제인지 아니면 너무 오래되어 유적지가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다. 현존하는 구마성 유적도 너무 오랫동안 방치되어 많이 훼손되었으며 부분적으로 남아있어서 정확한 크기를 가늠할 수는 없다.

▲ 이정한 청운중 교사·동구지역사 연구위원

앞으로 울산의 구마성 유적지에 대한 전문적인 학술조사를 통하여 정확한 유적 분포와 연대측정 등을 파악해 울산목장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정한 청운중 교사·동구지역사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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