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울산농(籠)의 역사

▲ 90년 전 제작된 울산농. 김동수기자 dskim@
병영 일원 공방집결지 존재 추정

50·60년대 신식장롱에 밀려 쇠락

대도시 고미술 애호가 가치 인정

◆ 장(欌)과 농(籠), 그리고 울산농

목가구는 재질이 주는 따스함과 장인기술의 화려함까지, 우리 선조의 멋과 생활을 보여주는 대표적 아이템이다.

그 중에서도 울산의 장인들은 ‘울산농’이라는 특유의 목가구를 개발했다. 견고한 장치와 수려한 뇌문(雷紋) 등 여느 장롱과는 확연하게 달랐던 울산농은 살림을 도맡았던 안주인들의 세간살림 보물 1호로 한 세월을 풍미했다.

의복 및 시대상 변천에 따라 이제는 골동품으로 전락한 울산농이지만, 그 속에 담겼던 남다른 가치는 시대가 바뀌어도 사그라들지 않고 아직도 빛나고 있다. 울산농의 독특한 예술과 기능성을 재발견하고, 그 명맥을 잇는 방법은 없는 지 총 4회에 걸쳐 재조명 해 본다.

흔히 쓰는 말, 장롱(欌籠)의 사전적 의미는 ‘옷 따위을 넣어두는 장(欌)과 농(籠)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요즘엔 한 단어로 묶어 하나의 가구를 일컫는 말이 되었지만,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가도 장과 농은 엄연히 다른 세간으로 분류되었고, 각각의 형태와 쓰임새도 달랐다.

장(欌)은 옷장, 찬장, 책장 등 물건을 넣어두는 가구의 총칭이다.

키높이나 넓이에 상관없이 그 속이 여러 층으로 나뉘어져 있어도 옆면이나 뒷면이 하나의 판(板)으로 마감된 것이라면 일단 ‘장’으로 분류된다. 내부의 층높이에 따라 2층과 3층, 높게는 4층장까지 나뉜다.

이에 반해 농(籠)은 주로 옷이나 버선 등 의복을 넣어두는 용도로 사용됐다.

모양도 1층과 2층이 독립적으로 나뉘어져 장과는 다소 차이가 난다. 사대부가 많았던 경기도 및 전라도가 고급장(欌)으로 유명한 반면 경상도는 보다 서민적인 농(籠)문화가 주류를 이룬다. 그 중심에 ‘울산농’이 있다.

◆ 울산농의 제작연대

목가구는 소모품이다. 나무 재질에다 늘 곁에 두고 사용하는 생활 소품인지라 쉽게 닳고, 깨지고, 부서져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 바에는 100년 이상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키가 작은 반닫이나 육중한 물건을 넣어두던 궤의 경우 제작연대가 200년을 넘는 고가구가 종종 선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가벼운 옷가지를 주로 보관하던 농의 경우 나무재질의 강도가 높지 않기 때문에 100년을 넘기면 상당히 오래 된 물건으로 평가받는다.

고미술 및 고가구를 취급하는 업계에 따르면 울산농은 최고 100~80년 전까지 번성했고 최근 50년 전까지 쇠락의 길을 걸어오다 40년 전부터는 완전히 장인의 맥이 끊긴 것으로 추정된다.

십여년 간 고가구 등을 취급해 온 한국고미술협회 울산지회 이민수 회장은 “70대 이상의 울산 사람들에겐 ‘울산농’을 일컫는 또다른 말 ‘울산문갑장’ ‘울산장’ ‘병영농’ 등이 익숙할 것”이라면서 “어원에 비추어 지금의 병영에 공방집결지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 제대로 연구된 바는 없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받침 장식이나 경첩의 문양 등 전국에서도 유례가 드문 울산농은 아이러니하게도 이 곳 울산보다 부산 및 서울 등의 고미술 애호가들에게 더욱 가치를 인정받는 중”이라고 덧붙였다.

지난 80년대 초반부터 고미술품으로 울산농을 취급했다는 소목장 김종수씨는 “수백 기의 울산농이 내 손을 거쳐 보수되고 재제작되어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아 가거나 혹은 새 주인을 만났다”면서 “1900년대 초반부터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물건들이 가장 많으며, 1950~60년대 이후 신식 장롱에 밀리면서 점차 울산농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