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살던 고향은...(19) 농소 신천 모단부락(상)

▲ 북구 제내마을 전경. 밭과 농가주택이 있는 농촌의 모습과 아파트 등이 속속 들어서는 개발의 모습이 공존한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마을 정 중앙에 터잡은 집엔 나그네 손님들로 언제나 북적북적

평생 가난 속에도 길손에 후했던 어머니 음덕에 자손 번창한듯

한마을 말띠 동기 9명 전국에 흩어져 살지만 마음만은 그대로

나의 고향은 농소면 신천리 모단부락이다. 모단은 못이 있는 안 쪽이란 뜻이다. 이 이름이 한자로 바뀌어 제내(堤內)가 되었다. 일본인들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전국의 지명을 한자화했는데 제내라는 이름도 당시에 억지로 만든 이름이다. 1918년경인가 한다. 얼마나 많은 정감어린 우리말 지명들이 이 때를 기점으로 사라졌는지 모른다. 앞산띠, 주불, 원두고개 통시미, 맨거랑, 갱빈 모두가 말이다.

모단은 행정 구역으로 농소면 신천리에 속한다. 이 신천리는 찬샘이, 갈밭, 못안의 작은 부락들이 모여 붙여진 이름이다. 신천리의 북쪽은 중산리이고, 동쪽은 매곡리이며, 남쪽은 호계리, 서쪽은 천곡리다. 그 중심부에 있는 신천은 동대산을 등지고 동천강을 안고 있는 형국이다 이른 바 배산임수라 할 수 있다. 멀리 서쪽으로 박제상의 이야기로 유명한 치술령이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망부석이 된 그의 부인이 지금도 내려다 보고 있다.

우리 마을 못안 곧 모단은 앞 쪽에 큰 못이 있었다고 한다. 못 언덕 안 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못안이었다. 지금은 아파트와 빌라 형의 주택이 가득하지만 원래는 50호가 되락말락한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양달과 음달 그리고 장등만디가 합하여 모단이 되었다. 양지쪽과 음지쪽, 그리고 웃마을이 옹기종기 모인 자연부락이다.

이곳에 우리 아버님이 터를 잡은 것이 100여 년 전이다. 약수라는 마을에 살다가 이곳으로 옮겼다고 들었다. 경주김씨 호정공파 후손들이 살던 터전이라 그 연줄로 옮겨 오신 것이다. 필자는 경주김씨 호정공의 16대 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호정 선조는 중종 임금 때 장원 급제하셨고 여러 고을의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친 분이다. 거기다가 회재 이언적 선생과 교분이 두터워 문집에 시문이 실려 지금도 전해 오고 있다. 나의 당숙이며 문회의 회장인 김 윤철님도 그 후손으로 지역 발전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 제내마을 곳곳에 폐차장과 공장들이 들어서 있다. 김동수기자

마을의 가장 중앙쯤에 우리 집이 있다. 신천리 300번지다. 풍수상으로 길한 터라 하여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고 듣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5남 1녀가 자란 곳이다. 거기다가 우리 어머니 편에서 보면, 넷째 아들이 대학교수에다 문학 박사요 친손과 외손이 나란히 사법고시에 올랐다. 그 외의 친손 중에도 꼽을 만한 자녀가 여럿이다. 이런 연유로 그런 소문이 난 듯하다.

어머니는 이미 작고하셨지만 내심 그것이 자랑이셨다. 여든이 된 즈음이었다. 몸이 약간 불편할 때다. 풍기(風氣)가 온 것이다. 상에서 밥을 잡수시는데 한 쪽 입으로 들어 가던 음식이 자꾸 상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함께 밥을 먹던 손자 녀석이 이를 보고 흐른 밥을 주워 먹으며 할머니가 밥을 흘리시네 하는 것이 아닌가. 열다섯 살 때 일이다. 그러면서 할머니에게 밥을 떠 넣어 드렸다. 나는 곁에서 이 광경을 보고 우리 어머니는 복을 받으신 분으로 생각했다. 자식을 가르쳐서만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평생을 가난 속에 보내시면서도 자부심은 대단하셨다. 일찍이 홀로 되신 어머니는 나그네에게 냉대한 적이 없는 분이다. 해질녘에 우리 마을에 찾아든 나그네가 있으면 모두들 우리 집을 가리켰다. 방물장수, 꿀장수, 먼 길 가는 비구니, 살길 찾아 헤매는 정처없는 사람들 모두가 우리 집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러나 한 번도 이들을 내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것이 어머니의 적덕이었는가 한다. 맹자 말하길 ‘너에게서 나간 것은 너에게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어머니의 음덕을 지금 우리 자손들이 누리고 있다.

우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당수나무가 있다. 우리 집에서 100m도 되지 않는 곳이다. 우리 마을의 수호신으로 주민 모두가 신성시하는 이 당수나무는 소나무이다. 몇 백 년은 되었음 직하다. 지금도 우람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이곳에는 일 년에 한 번 정월 보름날 저녁에 마을 제를 지낸다. 마을에서는 해마다 유사를 정하여 이를 주관하게 한다. 제주가 된 사람은 몇 주 전부터 몸과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모든 삿된 것을 물리친다. 보름날 저녁, 마을 유지들과 정성스레 제를 마치면 음복을 하고 나무 몸통에 창호지를 여러 장 묶어 둔다. 이 시간쯤 되면 모든 학동들은 깊은 잠에 빠져 있을 시간이다. 이 학동들이 새벽에 제일 먼저 창호지를 뽑아 가면 공부를 잘한다고 하는 속설이 있어 경쟁이 매우 심했다. 나도 여러 번 이 종이를 뽑아 즐거워 한 기억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일찍 일어나서 근면 성실하라는 어른들의 교훈에 속은(?)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유독 말띠가 많았다. 아랫마을 웃마을 합하여 아홉 명이나 되었다 모두가 나와 동급생들이다. 문열이, 시대, 구사. 현동이. 만기, 현주, 정일이, 군자 나까지 해서 아홉이다. 당시 농소 초등의 한 학년이 100명 정도였다. 그 중에서 9명이 이 작은 마을에서 나왔으니 놀랄 일이다. 어째서 같은 마을, 같은 시기에 태어나 함께 자라고 만나게 하였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지금은 전국으로 흩어져 살고 있지만 만나면 항상 반가운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가 남이가” 라는 구호를 누가 창안했는지 참으로 어울리는 말이다. 유일한 여자 친구 군자는 부산에 살고 있다는 소문을 풍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정월 보름이 되면 마을에 풍물패가 등장한다. 징, 장고, 꽹과리, 법고가 중심이 되고 포수가 뒤따른다. 바람잡이도 있고 양반도 있고 여장남인도 있다. 이 사람들의 광대짓이 우리를 즐겁게 했다. 그러면 우리 같은 조무래기들은 그 소리의 신바람을 따라 일 열로 따라 다닌다. 이 풍물패는 마을의 지신을 밟고 일 년의 평강을 빈 뒤에 집집마다 방문한다. 그리고 그 집의 구석구석을 돌며 주문을 왼다. 장독대도 빼놓지 않는다. 장독대는 간장, 된장 고추장이 저장된 공간이다. 뿐만 아니라 멀리 나간 자식들의 무사를 비는 어머니들의 발원처다. 정화수를 떠놓고 천지신명께 새벽마다 기도하는 도량이다. 한바탕 놀고 나면 주인이 떡이

▲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며 술이며 내 놓고 사례한다. 그리고는 다음 집으로 간다. 이것이 보름날 우리 마을 민속의 가장 큰 행사였다. 이런 놀이가 마을을 한 가족으로 만든다는 것을 안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징, 장고, 꽹과리, 법고의 사물이 절의 범종각에 있는 종, 북, 운판, 목어의 변형이라는 것도 말이다.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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