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삶·지혜 담긴 옹기]500년 요업 메카 울산

▲ 조선 중기 때 가마를 설치해 대접, 사발, 술잔 등의 중·하품급 백자를 생산했던 재약산 산꼭대기에 있는 천황산 요지군.
언양현 하잠의 ‘분청’ 조선시대 3대 도자로 번성 누려

당시 중앙·지방 관청에 물건 들이는 창흥고에도 납품돼

범서 점촌도 해방이후까지 울산 최대 옹기마을로 성업

울산의 자기(옹기) 역사는 고려말과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말 부터 조선후기 까지 울산 곳곳에서 도자기가 구워져 관청에 납품됐다. 삼동면 하잠리는 고려말에서 조선초까지 우리나라 최대 요업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다. 청량면 삼정리에서는 조선중기때,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천황산 요지에서는 조선후기에 각각 수많은 자기를 구워냈다.

정양모씨가 펴낸 <한국의 도자기>에는 15세기 울산의 분청사기 도요지로 삼남면 둔기리, 온양읍 삼광리, 언양읍 평리, 청량면 삼정리, 상북면 이천리 등을, 백자 도요지로는 조선 중기 백자와 철화무늬편이 나온 상북면 산전리로 기술하고 있다. 자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흙, 연료, 물 등이 풍부한 탓에 울산 곳곳에 가마가 설치돼 자기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울산 자기의 역사성과 전통성은 사실상 언양현 하잠 도요지에서 찾을 수 있다. 하잠의 분청은 강진의 청자, 광주의 백자와 함께 조선시대 도자기의 3대 메카의 하나로 번성을 누렸다. 학계에서 조선 500년여간 한국요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곳이 울산이라고 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는 조선시대 울산군에 자기소 1, 도기소 1 , 언양현에 자기소1, 도기소 1곳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조선시대 영남권 최대의 언양자기소와 도기소가 있었던 곳이 바로 하잠리다. 인근 삼동면 작동리 배아골 도요에서도 백자를 생산했다.

하잠리 도요지(도자기나 기와·그릇을 만들어 굽던 가마터)에서는 고려말기의 전통을 이어받아 청자(靑瓷), 백자(白瓷), 분청사기(粉靑沙器) 등을 생산했다. 대접 , 접시, 종지, 동이, 병, 태항아리 등 각종 기형의 백자, 회청자, 백토분청 등을 굽었다. 여기서 생산된 자기는 조선초기의 관청인 인수부나 궐내의 여러 관청에 쓰는 물건을 납품하는 창흥고에도 납품됐다.

이처럼 이 곳에서 생산된 자기를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도자기를 공납했다는 사실은 가마터에서 수습된 자기의 바닥에 쓰여진 당시의 관사명과 지방명 등의 명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하잠리 도요지는 태종 17년(1417)때부터 경상 좌수영이 이설된 1468년 폐요되기 전까지 중앙에 자기를 납품을 한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삼동 하잠리 요지군은 지난 2000년 11월9일 울산기념물 제37호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울산의 자기명맥은 해방이후 대부분 명맥이 끊어지고 말았지만, 이곳 삼동면 하잠리 사촌에서는 불과 40여년전까지만 해도 12개의 가마에서 도자기를 구워 시중에 판매하기도 했다. 하지만 스테인리스 그릇과 플라스틱 용기가 대중화되면서 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다.

▲ 조선시대 3대 도자기 메카로 번성을 누렸던 하잠리 도요지 출토 파편.

울산지역에서 하잠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토기를 구워낸 곳은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방리 도요지다. 이 곳에서는 통일신라시대부터 토기를 생산해 냈다. 이같은 사실은 2002년 대곡댐 유물조사때 이곳에서 토기가마와 함께 많은 토기편이 출토됨으로써 확인됐다.

방리 도요지에서는 이유는 알수 없지만 고려시대를 뛰어넘어 조선 중·후기인 17세기~18세기께에도 백자를 생산해 냈다. 대곡댐 유물조사 때 이곳에서는 당시의 대접, 접시, 사발, 항아리 등의 각종 자기편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18세기 인근 두동면 상삼정리 도요지에서도 백자가마에서도 사발, 접시, 백자철화, 흑유항아리, 백자병·흑유병, 도자기 등을 생산했다.

또 울산시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 재약산(천왕산) 1100m 고지 위치한 백자(白瓷)요지군(사적 제129호)에서도 조선 중기~후기 까지 자기를 구워냈다. 우리나라에 있는 요지 중에서 가장 높은 산상에 위치한 도요지이다. 고지대에 도요지가 설치된 것은 그릇의 원료가 되는 흙과 가마를 짓기 위한 돌, 그릇을 굽는데 필요한 땔감과 물이 풍부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이곳에서는 백자 가마터로 5∼6기와 함께 대접, 사발, 바래기, 종지, 공기, 술잔 등의 조각이 발견됐다. 이곳 도요지에서는 자기의 색깔이 회백에 담갈색을 띠고, 태토(胎土)와 유약(釉藥) 내에 철분 등이 함유되어 있고, 환원번조(還元燔造)가 보장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품질이 아닌 중·하품의 백자를 굽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 풀과 동그라미, 점 등을 철사로 새겨넣은 철화무늬 백자조각들도 발견돼 조선초기 분청사기의 영향을 받아 조선 중기 경상도 해안가에서도 드물게 철화백자를 생산했던 것으로 연구됐다.

사연댐 수몰지역인 울주군 언양읍 태기리 안옹태 마을에서도 조선초기 인화문 분청사기를 비롯해 청자, 백자 조각이 다량 발견되는 점으로 미뤄 조선시대 대규모 백자도요지가 있었다. 또 조선 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살았던 울주군 상북면 덕현리 살티마을 공소 인근 검산계곡에서도 백자를 구워냈다.

울산의 요업이 자기에서 옹기 중심으로로 전환된 시기는 조선말기로 추정된다. 조선 말기 당시 온양과 범서, 두동, 웅촌, 청량 등에 옹기점이 들어서 옹기가 성업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자기업은 해방이후 수년간 삼동 하잠지역에서 생산된 것을 제외하고는 울산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울산은 일제시대 때 이미 타 지역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옹기업이 번영을 누렸다. 당시 옹기 도공의 인기는 대단해 옹기업주들은 항상 선금으로 노임을 지급해 옹기 생산에 차질이 없도록 배려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옹기의 수요가 대단해 울산 도처에서 동막의 물레가 쉼없이 돌았다. 옹기는 주로 현금보다는 현품인 곡식으로 물물 교환으로 거래가 이뤄졌다.

특히 범서 첨촌마을 경우 일제시대부터 해방이후까지 울산 최대의 옹기마을로 성업을 이루었던 곳이다. 이곳에는 독, 떠꺼리(독뚜껑), 벼리, 살사구, 콩나물동이, 장단지, 김치단지, 약탕기, 종지, 뚝배기, 등잔, 호롱, 초병 등 30여종에 달했다. 이들 옹기 도공들은 60~70년대 온양이 옹기의 중심지로 부상하자, 온양으로 이동해 현재 외고산이 한국 옹기의 메카가 되는 밑거름이 됐다.

김창식기자 goodgo@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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