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성덕대왕 신종

▲ 종을 만드는 일은 탑과 불상에 비해 어렵다. 그렇기에 경덕왕 때 시작돼 혜공왕 때 완공된 성덕대왕 신종은 신라의 명품으로 불린다.
성덕대왕 공덕 기리려 만들어 봉덕사에 걸렸던 종

주조과정 어린이 희생 전설 에밀레종으로도 유명

종 만든 장인들 찬양한 ‘기념비’도 경주박물관에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들에게는 봉덕사종과 에밀레종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종이 봉덕사종으로 불리는 것은 주조 후 성덕왕을 위해 세운 봉덕사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은 종을 만들 때 어린이가 희생되었다는 전설에서 왔다.

시대적으로 보면 이 종은 신라 마지막 명품이다. 문화와 예술 면에서 신라의 최 전성기는 경덕왕 때다. 탑의 명품인 불국사의 다보탑과 석가탑이 만들어진 것도 세계에 자랑 할 수 있는 신기의 석굴암 돌부처가 조성된 것도 이 때다. 그런데 성덕대왕 신종은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 때 완성되어 시기적으로 전성기를 살 짝 넘어섰다.

이 종은 오늘의 최신과학으로도 풀지 못하는 의문들이 너무 많아 신기의 명품으로 불리고 있다.

종을 만드는 것은 첨단 기술을 요구하기 때문에 불상과 탑 등 다른 예술품에 비해 어렵다.

경주국립박물관으로 들어서면 반월성이 있는 북쪽 누각에 걸려 있는 이 종은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 의해 가짜 종인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요즘도 박물관을 찾는 사람들 중에는 ‘진짜 에밀레종은 일본인들이 가져가다 동해에 빠뜨렸고 이것은 가짜지요?’하고 질문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박물관에 걸려 있는 종은 가짜가 아닌 진짜다.

▲ 경주박물관 성덕대왕 신종의 서쪽에는 ‘주종대박사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기념비는 성덕대왕 신종을 만든 장인들을 찬양하고 있지만 석질이 좋지 않아 보는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이 종에 대해 잘못알고 있는 것은 이 보다 앞서 만들어졌던 황룡사종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경덕왕은 이 종을 주조하기 전 황룡사 대종을 만들었는데 이 종은 무게가 성덕대왕 신종의 4배가 넘는 49만근이었다. 그런데 이 종은 몽고병들이 침입했을 때 동해에 수장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신라 사람들은 종소리야 말로 인간의 번뇌를 없애주고 선량한 마음을 갖도록 해 준다고 믿었던 것 같다. 종의 명문에는 종을 주조하게 된 경위와 성덕대왕의 덕이 산하와 같이 뛰어나다고 말해 성덕왕을 찬양하고 있다.

기술면에서 성덕대왕 신종이 중국·일본과 다른 것은 종뉴 옆에 음관이 있다는 것이다. 종을 쳤을 때 진동된 공기가 소리를 따라 울리면서 빠져 나가도록 하는 음관이 종위에 있는 것은 한국종의 특징이다. 종소리가 끊이지 않고 오래오래 멀리 가는 원인이 여기에 있다.

이 종의 주조는 역사적으로 신라의 한 시대를 마감시키는 획을 긋는다. 경덕왕은 종을 주조하면서 당시 상대등 자리에 있었던 김양상을 책임자로 정했다. 그런데 김양상은 나중에 혜공왕 때가 되면 반란을 일으켜 혜공왕과 부인 만월부인을 쫓아내고 자신이 왕위에 올라 37대 선덕왕이 된다. 신라는 이처럼 혜공왕이 쫓겨남으로 무열계가 막을 내리고 사실상 하반기로 들어서게 된다.

이런 애환을 담고 있는 이 종은 완성 뒤에도 평안하지 못했다. 당초 이 종이 걸렸던 봉덕사는 북천 홍수로 사라져 이 때 종도 함께 자취를 감출 뻔 했다. 홍수 속에서도 간신히 살아남았던 이 종은 조선조에 들어 세조 5년(1460)에 영묘사로 옮겨졌다.

당시 경주에 살았던 매월당 김시습이 이 종이 영묘사로 옮겨갈 때의 모습을 시로 남겨 놓았는데 이 시를 보면 이 종이 얼마나 천덕꾸러기의 대접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다.

寺廢汲砂礫 此物委榛荒는 恰似周石鼓 兒撞牛礪角

절은 쓰러져 자갈밭에 묻히고/종은 풀숲에 버려졌으니/주나라 돌북인 양/아이들은 돌로 치고 소는 뿔을 가네/

이 종은 중종 원년(1506)에는 당시 경주 부윤이었던 예춘년이 봉황대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쳤다. 이 종이 가장 큰 위기를 맞았던 것은 세종 때였다. 세종은 재임기간 동안 폐사된 전국의 종을 모아 무기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 때 세종은 이 종과 개성 연복사 종을 없애지 말 것을 명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종이 현재 경주문화원이 들어 서 있는 옛 경주 박물관으로 옮겨진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이다. 종이 현 자리에 걸리게 된 것은 1975년이다. 이 종을 구 박물관에서 옮겨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나 하는 것은 전 문화재청장인 유홍준씨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이 종은 박물관으로 옮겨진 후에도 1992년 까지는 타종했으나 제야의 종으로 한 겨울에 종을 치다보니 보존 관리에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는 우려 속에 1993년부터는 타종이 중단되었다.

경주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은 모두 이 종을 본다. 그런데 이들이 종을 보면서 종과 관련된 중요한 내용물을 보지 않고 지나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종 남쪽에 풀이해 놓은 명문의 내용과 또 종 서쪽에 있는 ‘주종대박사 기념비’다.남쪽의 명문은 종에 새겨져 있는 한문을 우리글로 풀이한 것으로 이 글을 읽어보면 종을 만들게 된 동기와 배경을 알 수 있다. 기념비는 이 종을 만든 장인들을 찬양하고 있는데 내용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신라 성덕대왕 신종은 혜공왕 7년(771)에 이룩된 신라의 기념비적 보배다. 종명(鍾銘)의 몇 구절이 이 종의 주종내력과 그 신묘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종은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대왕을 위해 구리 12만근으로 1장(丈)의 종을 만들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함에 그의 아들 혜공왕이 어머니 김씨 만월부인의 도움으로 완공했다. 사람과 신의 힘을 합해 만들었으니 그 형태는 산악같이 위엄 있고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꽃다운 인연을 맺어 복을 받는다 하였다. 실로 이 종은 조형의 아름다움이나 소리의 장엄함에 있어 인류가 만든 범종 중 가장 으뜸이라 하겠다.

이 신묘한 종을 만든 신공의 이름이 종명에 새겨져 있었지만 천수백년 오랜 세월이 흐름에 그 이름을 확인 할 수 없음이 애석하다. 다만 4사람의 종장(鍾匠)이 참여했는데 그 우두머리인 주종 대박사의 성은 박(朴)씨요, 그의 벼슬은 대나마였다. 우리는 오늘 이 위대한 장인의 높은 예술적 경지와 뛰어난 과학 기술을 기리기 위해 성덕대왕 신종을 만든 박대나마의 위대한 공적을 이 돌에 새겨 후일에 전하고자 한다.’

그런데 국립경주박물관이 97년에 내어 놓은 <경주 이야기>를 보면 4명의 장인이름이 주종대박사 박종일(朴從溢), 차박사 박빈나(朴賓奈), 내미(奈未) 박한미(朴韓味), 대사(大舍) 박부악(朴負岳)으로 밝혀져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기념비의 내용도 바뀌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아쉬운 것은 기념비의 모습이다. 기념비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는데 석질이 좋지 않아 글을 쓴 중간 중간이 파여져 있다. 이 기념비도 세월이 흐르면 문화재가 될 것인데 왜 이처럼 석질이 좋지 않은 돌을 사용했는지 분노가 치민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향토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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