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빙의 판세였던 대통령 선거전이 온 국민의 눈과 귀를 사로잡고 있던 지난해 말의 어느 일요일 오후 집근처 서점에서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의 자서전 제2권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재작년이던가? 리콴유 자서전 제1권을 접했을 때의 감동을 되살리고 싶은 욕심과, 전편을 읽었으니 후편도 반드시 읽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으로 "내가 걸어온 일류국가의 길"이라는 제목이 붙은 자서전 제2권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시간을 쪼개 간간이 복습도 하면서 그 숙제를 해치웠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불과 사십년 전만 해도 싱가포르는 국가라고 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그야말로 혼돈과 빈곤이 일상화되고 4개 언어가 쓰이는 혼란스럽고 왜소한 신생 독립국이었다. 부패, 파업, 폭력시위, 민족간 분열,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도처에서 활개를 치고 있었고, 급기야 이 문제들을 부담스러워 했던 말레이시아 연방으로부터도 축출 당했다. 군대도 없었고 식수도 없었다. 국가의 앞날에 대한 두려움과 절망감으로 총리가 국민들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그런 나라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사십년, 이 나라는 세계 최고수준의 일류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기적을 만든 리콴유에 대한 이야기가 쓰인 이 자서전은 미야자와 전 일본수상의 표현대로 그야말로 흥미진진한 나라만들기 교과서라 할 수 있다.

 동남아 국가들, 특히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간의 갈등의 원인과 전개과정은 물론 싱가포르내의 민족간 갈등과 그 치유과정에 대한 친절한 설명은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짭짤한 부수입이고, 한때는 동지였던 싱가포르내 공산주의자들을 고립시켜 가는 그의 현란한 정치 수완을 읽을 때는 웬만한 소설보다 더 밤잠을 설치게 된다. 제2권에서 눈에 뛰는 부분은 리콴유가 지난 사십 년간 만났던 전 세계의 지도자들에 대한 인상을 적은 부분인데, 몇몇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들에 대해 적어 놓은 부분에 이르면 매우 점잖은 그의 단어 선택과 표현 기교에도 불구하고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같은 책에서라도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읽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법. 필자는 그의 지성과 용기, 그리고 헌신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로서 국가를 만들고 키우며 지켜나가는 문제에 대해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현실에 바탕을 둔 치밀한 사고를 습관화하여 비전을 수립했고 이론가들이 저지르게 쉬운 정책의 실패를 거의 겪지 않았다. 그는 목적 달성을 위해 언제나 전략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했으며 궁극적으로 그것을 성취해 내었다.

 그는 또한 매우 용감한 사람이었다. 집권 초반부에는 이념적 갈등과 민족간 갈등의 와중에서 항상 생명에 대한 위협에 노출되어 있었으나 그는 이를 정면으로 돌파해 왔다. 집권 후반부에는 독선과 아집의 경계를 넘지 않는 절제를 보여 주었다. 오랜 정치적 동지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세대교체를 단행했고, 스스로 총리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비록 그가 젊은 지도자를 고르고 평가하는 방법과 젊은이들의 결혼에 대해 조언하는 데 이르러서 약간의 거부감을 느낀 것이 사실이지만, 지나치게 비민주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그의 발상이 그가 일생을 통해 온몸으로 보여준 국가를 위한 용기와 헌신의 가치를 조금이라도 훼손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정상회담 자리에서 "장기집권 하는 비결"을 물었다는 우리나라의 어느 대통령에게, 그는 "싱가포르 국민들이 내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국민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성실하게 노력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믿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전혀 말하지 않았고, 국민들은 차츰 내가 정직하고 진지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라고 대답했다.

 드라마 같은 성취를 이뤄낸 20세기 후반의 가장 위대한 정치인 리콴유가 주는 교훈은 단순하지만 우리에게는 절실한 것이라 하겠다. 어제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원칙, 신뢰, 투명, 공정, 대화, 타협, 분권, 자율, 국민통합을 이야기했다. 기대하며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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