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나라를 좋아하게 되는 것은 잘생겨서도 아니고 가창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어쩐지 장난끼와 익살스런 데가 있는가 하면 귀엽기 때문이다. 박경림의 인기도 뜻밖이다. 그렇게 스타의 기준도 많이 바뀌고 있다. TV를 보고 있노라면 진지한 내용보다는 시트콤 같은 재치와 유머 감각이 앞서는 프로그램이 호응을 얻고 있다. 가수 보다 백댄스들이 더 나서서 누가 중심인지 모를 정도일 때도 있으며, 노래가 주인지 춤이 주인지 모르는 경우도 있다.

 아파트가 주거생활을 지배하면서 안방보다 거실의 중요성이 높아졌다. 차츰 주방이 앞으로 나오더니 요즘은 가장 뒷전에 있었던 화장실, 욕실이 크로즈업 되고 있다. 이렇게 변두리나 뒤편에 있던 것이 스포트를 받는 등 주체와 중심권의 논리가 점점 흩어지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서열적이며 차별적인 것에서 차츰 차이로 바뀌고 있는 것을 느끼는데 이는 포스트모던의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포스트모던이 예술에서만 통용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철학은 물론 사회전체에 스며있는 일종의 시대적 의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드니즘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모드니즘이 있었기에 이루어진 것이며 사실 그 싹이 트기 시작한 것은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포스트모던의 최초의 싹은 니체, 프로이드 그리고 마르크스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는 학자도 많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라고 하는 말에서 그 신이란 상징하는 것이며 최고가치의 종말을 말하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은 의식(동일성)에서 무의식(타자성)으로 중심이동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것은 포스트모던의 해체적 내용과 연결되는 말이 될 것이다.

 막스의 유물론에서 본다면 헤겔(변증법)은 그 바탕이 정신인데 반하여 막스는 바탕이 물질이라고 본다. 즉 "인간의 의식이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의식을 결정한다"는 말로 여기서 포스트모던적 성격을 살핀다면 사회적구조(생산력)가 의식(이념과 제도)을 낳는다는 즉, 토대(생산)가 상부구조(문화적, 지적)를 성립시킨다는 의미로 토대적 의미의 중요성을 나타낸 것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때 니체, 프로이드, 막스에서의 포스트모던의 싹이라고 하는 것은 공통적으로, 중심이라고 생각하는데서 벗어나 타자적이며 차이성을 나타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구조적 상황에서 생성의 변화에로의 사유를 끌어내어 예술세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기치고 있는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의 "사건철학"은 포스트모던을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다. 나뭇잎 하나가 흔들리는 것도 사건으로 생각하는 이야기에서 우리는 하잘 것 없고 덧없는 변두리의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느끼게 된다. 그 순간만 지나면 사라지는 이마주, 그 이마주가 사실 진정한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결정적이고 본질적이며 중심적 실체론에서, 비결정론과 우발적 사건론으로 시대는 바꿔져 가고 있다. 지금은 포스트모던 시대인 것이다.

 움직이지 않고 서서 음정, 박자, 감정을 따지며 노래 부르던 시대는 가고, 춤이 주인지 노래가 주인지 모르며 백댄스들이 가수보다 앞에 나와 박수를 받는 시대가 됐다. 중심이지 못하고 변두리 였던 면들이 스포트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통과 실체적 느낌이 더 앞서는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된 이번 대통령 선거의 결과도 어찌보면 포스트모던 시대의 영향을 어느 정도는 받았으리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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