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7년판 울산호적대장에 나이·직업·주소 등 명기

조부까지 양반…부모대에서 양인으로 신분변화

귀국 이후 행적 묘연…신분 격상 후 개명 추정도

시민에 박어둔 가치 알리고 역사 아이콘 키워야

▲ 박채은 울산남구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 소장이 박어둔의 기록이 적힌 1687년의 울산호적대장 사본을 들어보이고 있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지난 300여년 동안 ‘울산호적대장’ 속에 파묻혀 있던 독도사수대의 주역 박어둔의 실체가 마침내 드러났다. 학계에서는 그동안 그의 출신지역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으나 이번 울산호적대장의 기록으로 박어둔이 울산인이라는 사실에 쐐기를 박게 됐다.

■울산호적대장 속의 박어둔(朴於屯)

호적대장(1687년 판) 속의 박어둔은 당시 나이 26세의 건장한 젊은이였다. 경주(월성 박씨)가 본관인 그는 상록수림이 뒤덮인 목도가 훤히 내다보이는 바닷가 마을, 울산부 청량면 목도리에 살았다. 인근 청량면 오대리에는 조선 4대 염전 중 하나였던 ‘마채염전’이 있었다. 그의 생업은 그 곳에서 소금을 굽는 염간(鹽干)이었고, 간혹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고기를 잡는 어부(해척·海尺)로도 활동했다.

험한 일을 했지만 그의 신분은 천민과는 구분되는 양인 계층에 속했다. 호적대장 속에 함께 기록 된 그의 조부(국생)와 증조부(잉석)는 통정대부 및 가선대부 등을 지낸 고위층 관료였다. 그러던 것이 아버지대에 내려와 급격한 신분변화를 겪게 된다. 아버지(기산)는 양인 농민 신분으로 군역을 복무하는 정병(正兵)이었지만 그의 어머니 윤씨와 아내 천씨는 둘 다 외거노비(천민) 출신이었다.

그가 역사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년후의 일이다. 1693년과 1696년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의 영토사수대원으로 활동한 일 때문이다. 동래수영군 관노였던 안용복과 10여명의 울산 어부들과 함께 울릉도 연해로 나갔다가 우리땅 울릉도(독도) 해역에서 노략질을 일삼는 일본인들을 보고 격분, 그들을 쫓아냈다.

박어둔은 안용복과 함께 일본까지 납치되었지만 오히려 그들로부터 울릉도가 조선땅이라는 서계를 받아 조선으로 귀국, 정부 관료는 물론이고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국토수호의지를 다시금 불러일으킨 장본인이 됐다. 영토사수를 위해 대항해를 감행한 어부 가운데 박어둔의 신분이 가장 높다. 당시 철저한 신분제 사회에서 박어둔의 주도설에 힘이 실리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1696년 이후 박어둔의 행방은

3년마다 작성된 울산부호적대장에 박어둔의 기록은 아직까지 1687년판 단 한 곳에서만 확인된다. 1720년판 청량면 호적대장에서는 그의 이름이 사라지고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박어둔이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납치됐다 본국으로 되돌아 온 과정에 대해 여려 차례 기술하고 있지만, 이후 나라의 허락 없이 울릉도와 일본까지 다녀온데 대한 처벌 과정에서 박어둔의 이름은 슬며시 사라지고 만다. 안용복에 대해서만 한양으로 압송되고 귀양을 가게되는 과정을 싣고 있을 뿐이다.

또한 그의 본관인 월성박씨 가문의 대동보에서조차 그의 이름을 찾는 일은 요원하다.

이 모든 고문서를 뒤지며 수년동안 ‘박어둔 찾기’에 골몰했던 박채은 울산남구문화원 부설 향토사연구소장은 그의 행방이 묘연해 진 까닭에 대해 세 가지 가설을 내놓았다.

절손이 되어 일가가 더이상 이어지지 못했거나, 아니면 울릉도에서 돌아온 뒤 울산을 떠나 타지역으로 이사를 갔을 수도 있다고 추론했다. 또한 당시 신분변화가 급격했던 사회분위기를 들어 “중인이나 그 이상인 양반신분으로 격상되어 가문의 영광을 되찾았고, 이름까지 아예 바꾸어 버렸을 수도 있다”고도 비정했다.

■박어둔 공동연구회 결성 등 재조명작업 이어져야

울산호적대장 속의 박어둔이 빛을 보게 된 것은 사실 박채은 향토사연구소장이 지난 2년여 동안 지역 향토사학자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박어둔 조명’에 누구보다 애써 왔기에 가능했다.

울산호적대장은 다양한 분야, 방대한 분량에 걸쳐 울산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지만, 아직까지 울산에서는 몇몇 개인이 필요한 부분만을 추려 낸 복사본을 가지고 있을 뿐 전권을 다 살펴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원본이 있는 서울대 규장각을 오가며 홀로 연구에 골몰했던 박채은 소장은 그 동안의 연구자료를 모아 ‘독도지킴이 울산어부 박어둔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곧 연구논문을 발표할 터였다.

그는 “울산인 박어둔의 존재가치를 시민들에게 알리고, 지역의 자긍심을 드높일 역사아이콘으로 키워내는 일은 누군가 분명히 해야 할 일이었고 더이상 늦출 수 없는 작업이었다”면서 “또다른 연구자가 박어둔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며, 더 나아가 각계각층의 힘을 모아 관련 자료를 교류하는 ‘공동연구모임’을 결성한다면 ‘박어둔 재조명’이 더욱 급물살을 탈 것으로 기대된다”고 덧붙였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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