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26일 한 프랑스 화학자의 발표는 세계를 뜨겁게 달구어 놓았다. 그것은 오래 전부터 논란이 되어온 최초의 복제인간이 탄생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뜨거운 소용돌이 속에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각 종교단체, 시민단체에서 비난 성명을 발표하고, 인간복제를 원천적으로 금지하는 법안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인간복제, 이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찬성하는 쪽은 현존하는 난치 혹은 불치병을 효과적으로 치료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라는 것이고, 반대하는 쪽은 먼저 태어난 자를 위해 한 생명을 죽이는 일이며,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일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최초의 복제인간이 탄생했다고 주장하는 단체의 핵심은 다른데 있다는 점을 먼저 지적하고 싶다. "라엘리언"이라는 단체는 인간이 2만5천년전 비행접시를 타고 지구로 날아온 외계인으로부터 복제된 존재이며 따라서, 지금의 인간도 복제돼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주장을 바탕으로 복제인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의 복제인간에 대한 찬반논쟁이 자칫 이들 단체의 주장에 국한되지는 않을까 우려된다.

 그럼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입장에서 복제인간은 어떤 의미일까? 결론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복제인간은 주된 관심의 대상이 아니다. 생명공학의 발달과 체세포 핵치환 기술로 인류가 얻고자 했던 것은 복제인간이 아닌 "질병의 치료" 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토록 복제인간에 대한 우려가 높은 것은, 뒤집히기 쉬운 동전의 양면처럼 치료적 목적의 배아복제가 언제든지 인간복제로 넘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렇다면 배아복제마저 원천적으로 금지시켜야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전에, 이러한 연구결과로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과 가족들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인류는 여태까지 질병과 싸우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며, 그 노력 중의 하나가 배아복제를 통한 치료법의 발견이다. 하지만, 생명윤리라는 측면에서 이 방법을 포기해야 한다면, 다시 인류는 다른 방법을 찾아 좀더 많은 시간과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쉽게 결론 내릴 수 없는 부분이고, 작게는 사회적인 합의, 크게는 전 인류의 합의를 통해야 하겠지만,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알고 있는 의사의 입장에서는 새롭게 발견된 치료적 가능성이 묻혀버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필자 역시 복제인간의 탄생에 대해서 그 진위여부를 떠나, 심각한 우려와 당혹감을 금할 수가 없다. 한편으로, 이러한 우려와 당혹감이 왜 생기는 것일까 하는 질문도 던져보았다. 1월 8일자 일간지에 실린 한 대학생의 글처럼 인간복제에 대해 반감을 갖는 것이 우리의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는 낡은 관념과 타성의 이끼 때문이라는 의견도 읽어 보았다. 기독교적인 교리가 과학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를 좌절시킨 예가 있었다는 비판이었지만, 일반인이 갖는 우려와 당혹감은 종교적인 문제를 떠나서 보편적인 원리, 즉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기본적인 본능으로부터 기인할 것이다. 따라서, 인간복제의 논쟁이 종교적인 이념논쟁으로만 다루어져서는 곤란하며, 종교계에서 인간복제, 나아가 배아복제까지 반대하는 입장도 경청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우려 속에서 보건복지부는 "난치병 치료를 위한 배아복제 및 배아줄기세포 연구는 허용하되 이것이 인간복제로 이어지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가 무엇인지 찾고 있다"고 발표하였다. 여기에 개신교와 천주교에서는 배아도 곧 생명이기 때문에 비윤리적이므로 이러한 정부의 발표에 반대한다는 성명을 내고 있다. 서로의 주장을 떠나서라도, 그 "장치"가 완전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많은 고민 끝에 내려진 방향이라 생각이 되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토론과 수정이 이루어지리라 기대하고 있다. "복제인간" 이라는 상자는 이미 열렸고, 이제 그 희망을 어디서 찾을 것인가 남아있는 이 시점에서 인류는 또 한번의 시험대에 올라서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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