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으로는 멀리 문수산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는 물막골을 지나 멀리 신불산 너머로 노을이 지며, 마을 앞으로는 사철 부엉이가 울어대는 부엉듬 밑으로 옥 같이 맑은 물이 흘러내리는 애밀천이 있었다. 남으로는 작동을 지나 부산으로 통하고, 서남쪽으로 신라시대 유명한 축성사의 절터가 있었다. 가장 큰 들인 축성들을 이루는 젖줄인 축성천의 상류를 거슬러 긴 골짜기 삼동골을 지나 통도사에 이른다. 축성천과 애밀천이 마을 앞에서 합수하여 작은 소를 이루고 동북쪽으로 내달아 대암을 거쳐 태화강에 이른다."

 삼동면지 둔기리 편에 실린 수몰되기 전의 둔기리를 묘사한 글이다. 꿈처럼 아름답던 둔기리는 1969년 대암댐 건설과 함께 사라졌다.

 댐이라는 거대한 구조물에 주민들의 삶터가 잠겨버렸을 뿐아니라 그와 함께 둔기리를 비롯한 삼동면 일대는 기온도 뚝 떨어지고 습도가 높아져 농사가 잘 안되고 있다고 주민들은 하소연한다. 주민들은 일기예보를 보면 서울의 온도와 비슷하다며 울산시내와는 5℃는 차이가 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둔기리 하작마을 등은 삼동면에서도 서리가 내리는 날이 가장 많은 마을이다. 둔기리에 이어지는 작동리 중리에 사는 노용규씨의 1999년 영농일지에 따르면 연중 서리가 내리는 날만도 126일로 나타났다.

 안개도 많아져 감나무를 비롯한 유실수의 과일이 제대로 열리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주민들은 외출했다가 저녁 늦게 돌아올 때는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안개가 끼기도 한다고 말한다.

 둔기리는 대암댐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이다. 둔기천을 사이에 두고 둔기리가 언양읍과 경계를 이루고 대암댐을 돌아나오면 상작과 하작마을이 작동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둔기리 주민들은 대암댐이 조성되기 이전과는 사뭇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한동안 10여가구로 줄어들었다가 최근들어 다시 가구수가 늘어 현재 20여가구에 이른다. 둔기횟집, 대암횟집, 레스토랑 풍경 등 5가구가 대암댐 앞 높은 위치에 자리해 상가를 이루고 있으며 양봉을 하는 1가구, 약초를 재배하는 1가구, 암자 등이 새로 들어왔다.

 13년째 이장을 하고 있는, 삼동면에서 가장 젊은 이장 조경용씨(45)는 "대암댐에 수몰되기 전에는 70가구가 되었다고 하나 수몰과 함께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근래까지도 13가구 정도로 줄었다가 최근들어 제각각 다른 목적을 갖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한둘 늘면서 20가구가 되었다"고 설명했다.

 상·하작 주민들은 예나 다름없이 논농사를 짓고 있다. 예전에는 풍부한 물로 인해 옥토를 가진 마을이었으나 요즘은 여느 농촌과 다름없이 노인들이 주로 살고 있다.

 하작마을 김규성 이장은 "마을 주민들의 평균 연령이 60대"라며 "논농사가 돈이 되지 않는 시절로 접어들면서 점점 젊은 사람들이 떠났다"고 말했다.

 둔기리는 마을의 일부가 대암댐에 묻혀버린 평범한 시골마을이지만 결코 예사롭지는 않은 마을이다.

 요즘사람들에게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기업인 롯데그룹 신격호 회장의 출신지로 이름나 있다. 요즘 사람들은 이 일대를 둔기리라고 부르기보다 "신격호씨 별장"이라는 이름으로 더 쉽게 떠올린다. 신격호 회장은 대암댐을 굽어보고 있는 이 곳에 넓은 정원을 가진 별장을 꾸며놓고 있다. 또한 그는 반천에서 하작마을까지 대암댐을 끼고 도는 도로를 닦아 울산에 기부채납했다.

 이에 앞서 둔기리 하작마을은 조선 때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장례를 지낸 공로로 공조참판을 지낸 엄홍도씨의 출신지로 이름나 있다. 후손들이 그를 받들어 원강서원을 세웠고 폐원 등의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현재 하작마을에 증 공조참판 엄공 원강서원 비석(울산시문화재자료 제10호)과 서원이 복원돼 전해지고 있다.

 1920년 간송 신진걸씨가 세운 사학기관인 둔기의숙이 있어 신학문 보급에 앞섰기 때문인지 울산시장은 지낸 신선열씨, 울산시 교육장은 지낸 이병직씨 등도 이 곳 출신의 인물로 꼽힌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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