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주군 서생(西生)면은 신라 때에 생서량군, 동안군으로, 정조 때 서생리라 하였다가, 고종 31년(1894)에는 북동과 남동, 1911년 성내동(城內洞)과 외리동(外里洞)이라 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서생포·서사포라고도 불렀고 조선시대에는 서생포영이 있었다.

 "서생"이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서사포"라 불렸던 이곳이 임란 때 서생성에 입성한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가 성의 축성법을 살펴보고 "팔문법(八門法)에 의한 축성이며, 생재서고(生在西故) 당작서생(當作西生)이라 하여 생기가 서쪽에 있어 서문으로 나간 사람은 살 수 있었으니 서생이라 이름 짓는다"한 이후로 서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조선 초의 기록에 이미 서생포만호(西生浦萬戶)라는 직함이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마귀의 말에 따라 지칭하였다기보다는 그가 서생이라는 땅이름과 관련한 신비스러운 일들에 대해 감탄하였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여기서 서생이라는 지명의 유래를 고찰하면, "서(西)"는 사(沙), 살(薩), 차(嵯), 사(斯)와 같이 넓은 들을 뜻한다. 그러나 고음(古音)이 "셰" 또는 "새"인 것으로 보아 서생은 동방 또는 ‘새 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서생이나 생서량·동안은 다 "새내(曉良·曙良)"의 뜻을 가진다.

 신라초기부터 군사적으로 해안수비의 요충지였던 이곳 서생성내의 옛 동헌 터 서쪽에는 선조 32년(1599년) 겨울, 왕명에 따라 세워진 창표당(蒼表堂) 사당의 유적이 있다. 창표는 "상앙창황시조문자지신공(上仰蒼皇始造文字之神功), 하표단충초간성명지위열(下表丹忠初刊姓名之位列)"에서 나온 말이다.

 이곳 창표당에서는 임진왜란 동안 울산에서 왜적과 싸우면서 공훈을 세운 판관 홍억제 등 10여명과 부정 김흡 등 28명 그리고 왜군을 물리치는데 끝까지 도움을 준 곽재우 장군을 포함한 15명의 공신 등 임란공신 56위의 충정을 기려왔다.

 명나라 제독 마귀는 한반도 동남단 서생 땅 옛 왜성 터에 사당이 축조되는 자리에서 창표당서(蒼表堂序)를 쓰면서, 조선이야말로 ‘천사의 심성지국(心誠之國)’이라며 높이 칭송했고 더 나아가 충의열사의 자손들이 장차 반드시 깊은 바다 속의 진주로 다시 나타날 것을 축원한 바 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이르러 의병들의 제사를 금지하고 사당의 관리조차 엄격히 규제하는 바람에 건물이 퇴락을 거듭하다가 해방 전후의 어수선한 시국 와중에 마침내 허물어져 버렸고 근래에 와서야 비로소 복원이 새삼 논의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임란공신을 기리는 추모제가 서생포 왜성 하단 3단으로 높게 축성된 대물례에서 봉행되었고, 서생면민 헌장에 창표당의 얼을 계승하려는 의지가 표출되고 있는 한편, 서생중학교의 교가에도 그 의로운 정신을 찬양하고 있는 등 충절의 정신이 오늘에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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