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는 추억이다.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들 치고 잠시나마 탁구장을 들락거리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던 탁구는 아득한 추억 속에나 있는 스포츠가 됐다. 86년 아시안게임, 88년 올림픽에서 유남규 선수가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잠시 탁구붐이 부활되기도 했으나 90년대 이후로 탁구의 인기는 완전히 수그러들고 말았다. 더구나 라켓볼, 골프, 테니스 등이 대중적 스포츠가 되면서 어느 도시에서도 탁구장을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2년전 S-oil을 정년퇴임한 주무지씨(60)는 "용감하게" 탁구라는 추억을 찾아 나섰다. 울산시 남구 신정1동 울산우체국 뒤편에 임대료가 싼 건물의 1층을 얻어 탁구장을 차린 것이다. 탁구대 4개를 나란히 놓고 간판은 "추억 탁구장"이라 달았다. 중학교 시절 탁구선수를 지냈던 그는 스스로의 추억을 찾아 젊은 시절로 되돌아가는 기분을 만끽하면서 그와 같은 세대들에게도 추억을 되살려주고 싶었다.

 "퇴직금을 적잖이 받았지만 그 돈을 까먹어가며 가만 놀아서는 안되겠더라구요. 아직 치과대학 3학년에 다니고 있는 막내딸 공부도 시켜야 하고, 하는 일 없이 놀고 지내는 것도 싫었죠. 그런데 막상 일을 하려니 마땅히 할 게 없더라구요. 주식에 투자하라, 보험회사·다단계판매회사로 들어오라는 등 유혹도 많았고 식당을 차리라는 권유도 있었지만 모두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곰곰 생각하니 탁구장이 떠올랐습니다."

 그로서는 탁구장이 취미와 건강을 유지하면서 돈도 버는 일석이조로 여겨졌지만 주위에서는 "돈 안되는 일을 시작한다"는 우려가 적잖았다. 그러나 그는 탁구장 문을 여는 날 "죽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이것이다"는 생각이 간절했다고 회고한다.

 요즘은 약간의 수입이 생길 정도가 됐지만 처음 1년동안은 하루 손님이 한두명이 고작이었다. 요금이 30분에 학생은 2천원, 어른은 3천원이니까 하루에 1만원 벌이도 안되었다. 퇴직금을 조금씩 빼내 쓰기도 했지만 탁구장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2년째 접어들면서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이 한둘 늘기 시작했다. 지금은 한달에 6만원을 내는 개인교습생이 5~6명, 월 5만원을 내고 자유롭게 이용하는 회원이 5명 정도 된다. 그 나름의 확신과 끈기가 일구어낸 성과다.

 "퇴직금 받아서 뭘 해본다고 하다가 몽땅 날린 사람이 많잖아요. 탁구장이 점점 없어지기 때문에 오히려 탁구장을 차리는 것이 기회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죠. 한국비료에서 10년, S-oil에서 20년, 30년동안 월급쟁이를 하면서 힘들게 세딸을 모두 대학을 보냈지만 공돈에는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거던요. 내 몸을 움직이지 않고 돈버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는 소신이 있었죠."

 그는 정년퇴직을 한 사람들이 쉽게 빠질 수 있는 유혹을 특유의 근면성실한 사고로 극복한 것이다. "이 길이 맞다"는 확신과 "반드시 잘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갖고 버텼다.

 "탁구장으로 큰 돈벌이는 못하지만 벌어논 돈 까먹지 않고 "건전하게 논다"고 생각하니 조급하지 않았습니다. 탁구를 치고 가르치는 재미도 쏠쏠했구요. 중학교 때 선수생활을 하면서 익힌 기술이 되살아나면서 마음도 몸도 덩달아 젊어졌습니다. 지금은 수익도 생기니까 더없이 만족스럽습니다."

 "요즘도 탁구치는 사람이 있겠냐"는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직장인들이 퇴근하는 저녁시간에는 4개의 탁구대가 꽉 찬다. 손님은 30대 직장인부터 60대 할머니까지 다양하다. 탁구공이 아니라 추억을 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추억 탁구장에서 학창시절 탁구장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아련한 표정으로 라켓을 잡는다.

 탁구장 한켠에 마련된 비좁은 그의 방은 그물로 벽을 만들고 낡은 책상 하나, 침대 하나, 탁자 하나, 쇼파 하나가 놓여 있다. 손님이 오면 등산용 버너를 꺼내 커피를 끓인다. 간간이 찾아오는 교복입은 중·고등학생들까지 합세하면 영낙없는 7,80년대 탁구장 분위기다. "추억탁구장"이라는 이름이 그럴싸해진다.

 그는 이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가에 50~100평 되는 2층 탁구장을 만들 꿈을 꾸고 있다. 벽은 유리로 해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나도 탁구를 쳐야지"하는 생각을 가질 만큼 "멋진" 탁구장을 운영하고 싶다.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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