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휴대폰은 그냥 "휴대폰"이 아니다. 걸고 받기만 하는 것 이상이기 때문이다. 이젠 휴대폰을 두고 왔을 때 괜히 "불안해지는 증상"에다 빠르게 똑똑해지는 휴대폰에 익숙해지지 못할까 은근히 "두려워지는 증상"까지 생겨날 형국이다.

 정보통신강국의 국민답게 최첨단 휴대폰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종횡무진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세상과 교신하는 대한민국, 이 땅에 사는 누구라도 이젠 휴대폰 없는 시간과 공간을 여유롭게 지내지 못한다. 휴대폰을 집에 두고 왔을 때 자신이 어떤 모습인지 상상해보자. 세상으로부터 교신에 실패하고 있다는 느낌에 공연히 하루 종일 불안해 한다. 옆에서 울리는 남의 벨소리에도 깜짝 놀라 주변을 주섬주섬 챙겨 보기도 한다. 중독되 있다는 증거다.

 그런데 휴대폰 소유 여부는 부차적인 문제가 되고 있다. 바로 휴대폰의 기능이 일차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 신형 휴대폰은 점점 똑똑해 지고 있다. 전화송수신은 기본이고 카메라, 캠코더, 인터넷, TV수신에 전자결재까지 자유자재로 할 수 있다. 이른바 "모바일세상"이 어느새 와버린 것이다.

 세상 변화에 따라가기 참 쉽지 않다. 세상이 빨리 변하는 탓도 있겠지만 내가 그 속도에 적응 하지 못하는 탓도 있다. 대선을 치르고 나서 항간에는 "2030의 신화"를 얘기하고 "5060의 쇠락"을 말하고도 있다. 요즘처럼 정신없이 돌아가는 세상에서 5060세대가 느끼는 감정은 어떨까? 아예 어떤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포기하고 살거나, 적응해 보려고 노력 하지만 너무 세상에서 비켜 서 있는 느낌을 갖지 않을까? 2030과 5060의 완충지대에 속하는 나로서도 버겁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얼마 전 후배가 자랑스레 새로 바꾼 휴대폰을 코밑까지 들이 밀고 이것저것 보여주며 한참을 설명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 휴대폰으로 실시간 TV화면을 시청할 수 있음을 알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혹여 내가 다른 버튼을 눌러 이 거룩한 문화충격 현장에 찬물을 끼얹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그 옛날 부시맨 콜라병 구경하듯 했다. 그저 걸고 받는 것에 만족해 하는 내 휴대폰 문화로서는 일대 혁명에 가까운 일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삐삐"라 불리던 호출기가 나왔을 때, 무전기 만한 휴대폰이 처음 나왔을 때, 그때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고 있구나 하며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그 놀라는 속도가 빨라지고 빈도가 잦아졌다.

 그저 난 내 생활에 충실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순간 돌아보면 세상에서 이만큼 물러서 있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유발하는 것은 비단 휴대폰 뿐만 아니다. TV, 자동차, 오디오를 비롯한 모든 기기들이 날이 가면 갈수록 첨단화하고 있다. 기기와 함께 제공되는 설명서는 아예 두꺼운 책이다. 새로 밤새 공부하지 않으면 이용하지도 못할 처지다. 무슨 암호같은 단어들로 채워진 설명서는 읽고 또 읽어도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평생공부"가 각종 기기 설명서 공부로 대체될 지경이다. TV시청도 마찬가지다. 이젠 리모콘이 없으면 시청하지도 않는다. 리모콘이 지긋하게 한 채널을 오래토록 지켜보게 하지 않는다. 인내심이란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이 문명의 이기들이 요즘 내 생활을 쓸데없이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밤새 공부하게 만들고, 리모콘을 찾아다니느라 이방저방을 헤매야 하고, 기능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한다고 애들에게 미개인 취급을 당한다. 우리 생활의 편리함 때문에 발명한 기기들에 우리가 중독되고 종속되고 있다. 이 기기들이 요즘 나를 노예로 부리고 있다. 자기모순의 시대, 이율배반의 시대, 새로 나오는 휴대폰이, 아니 모든 기기들이 내 생활에는, 내 인간관계에는 이런 모습과 배반이 없는지 뒤돌아 보게 한다.

 황지우 시인이 어느 시 말미에 세상을 편하게 관조하는 것에 대한 "문제는 그런 아름다운 폐인을 내 자신이 견딜 수 있는가, 이리라"고 했다. 어쩌면 대표적 "문명의 이기"중의 하나로 총애받는 휴대폰, 그 자체보다 우리 스스로가 더 문제가 아닐까. 우리 스스로 이젠 견디질 못하니까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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