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고수레라는 말이 있다. 농사를 위해 들에 나가 일하다가 샛참이나 점심을 먹기 전에 행하는 민속이다. 이것은 들을 지키는 지신(地神)이나 수신(水神)에게 먹을 음식의 첫 숟가락을 던져 주는 의식이다. 사람을 대신하여 들판을 지켜 주는 고마움에 대한 인사이다. 시장하다고 하여, 또 별미라 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변을 돌아 보고 배려하는 너그러움의 뜻이 들어 있다. 이는 자연물을 숭상하고 절대자와 함께 하려는 우리 선조들의 넉넉한 마음씨가 배어 있다.

가을 서리가 내리고 과일을 갈무리할 즈음도 마찬가지다. 나무에서 과일을 따되 깡그리 다 따지는 않았다. 적당한 개수를 나무에 그대로 남겨 두는 것이다. 공중에 날아 다니는 새에 대한 배려다. 늦가을 까지 감나무 끝에 달린 빨간 홍시는 한폭의 그림이다. 까치밥이라 하여 남겨 놓은 것이다. 들에서 곡식을 거둘 때도 떨어진 이삭들은 그냥 두는 법이다. 날짐승은 물론이고 두더지나 쥐도 먹으라는 거다.

상물림도 있었다. 지난 전통 사회 시절은 먹고 사는 일이 넉넉하지 못했다. 끼니 때가 되어도 모든 가족에게 독상을 차릴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상차림을 하고는 이를 시차를 두고 먹게 하는 것이다. 물론 제일 연장자나 가장이 식사를 하고 이를 물려 준다 그러고 나면 이를 다음 순차의 가족이 먹는 것이다. 이것이 상물림이다. 상에 음식이 차려져 있다고 해서 맛있는 것만 골라 다 먹지는 않는다. 다음 사람을 생각해서다.

고루 맛보되, 정갈하게 먹고 상을 물려 내는 것이다. 이는 미덕이다. 이 미덕은 식사 예절을 낳기도 했다. 비록 반찬이라 해도 함부러 뒤집거나 속만을 파먹지 않았다. 윗 사람이라 하여 독차지하지 않는 문화, 이것이 우리의 고유한 정신문화인가 한다.

벼슬 살이도 그랬다. 반열에 오르기 위해 과거를 보기는 했다 그리나 결코 이에 연연하지 않았다. 인품이나 능력이 출중해도 오로지 정상에만 오르려 하지 않았다. 충분이 장관이나 총리가 될 만함에도 사양하고 한직을 맡거나 중도에 사퇴한 경우를 역사에서 흔히 배울 수 있다. 조용히 물러나 후학을 지도하거나 개인적 수양으로 일관한다. 이 선조들을 우리는 어른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산을 오르는 태도도 그러했다. 풍광이 수려한 산을 오르되 절대로 산정을 정복하는데 목표를 두지 않았다. 오르다가 중도에서 돌아 서는 것이 이들의 산행이었다. 산오름을 독서로 생각한 어른도 있었다. 산에 오르면서 사색하고 정신을 닦아 학문 신장에 보탬이 되려 했다. 오늘날 등산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정상을 밟아야 성취감에 젖는 것과는 다르다.

산을 오르면서 가지는 자연과의 교감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산이 인간에게 주는 메시지가 얼마나 벅찬가. 그리고 나무의 종류며 버려진 돌덩이들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깨우치려면 정상만 고집할 여유가 없었다. 음미하고 마음에 담아 내려와 후진을 위해 기록해 두는 것이다.

시대가 바뀌고 환경적 여건이 달라지긴 해도 우리의 문화 속에는 이런 미덕이 숨쉬고 있다. 혼자 독차지하려 하지 않고, 남김 없이 독식만 하려 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아름다운 우리의 정신 문화였다. 뭔가 좀 남겨 두어야, 남도 또 후손도 가질 것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많은 문화적 발전을 이룬 것도 사실이다. 이런 아름다운 풍토 속에 살아온 우리지만, 너무 끝장을 보려는 성급한 문화가 우리를 혼란하게 한다. 정치가 특히 그러하다. 온통 지면을 메우는 정치 환경이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자. 남도 배려하고, 내일도 생각하는 상식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자.

김경수 중앙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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