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은 1964년에 발표한 김승옥의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안개>라는 영화로도 상영된 바 있고, 우리나라 소설의 획을 긋는 명작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의 한마디는 안개라고 할 수 있겠지만, 김승옥이 설정한 무진이라고 하는 가상공간은 현대인들에게 두고두고 한번씩 꺼내보고싶은 마음의 공간이요, 꿈과 일탈의 지역으로 남아 있다. 답답한 일상을 툭툭 털고 한번쯤 탈출하고 싶은 이상적 공간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서술자로 등장하는 "나"는 서른셋의 나이로 제약회사 중역이다. 며칠 후면 아내와 장인의 도움으로 제약회사 전무가 될 몸인데 휴가차 내려간 곳이 그가 젊은 시절을 보낸 고향, 무진이라는 곳이다. 2박3일의 짧은 여행이지만 그곳에서 선배, 동창도 만나고 음악교사인 아름다운 여선생도 만난다.

 〈무진기행〉에서는 선명하게 구분되는 두 개의 공간이 있다. 하나는 서울로 표상되는 일상의 공간이고, 다른 하나는 무진이라는 탈일상의 공간이다. 아내와 제약회사 전무자리가 있는 서울은 비록 세속적이지만 현실적인 가치의 중심이다. 이에 비해 안개와 바다, 여선생의 노래가 있는 무진은 몽환적이고 탈속적 공간이다. 아름답지만 머물러 있을 수 없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상경하라는 아내의 전보를 받고 갈등하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가게되는 것이다.

 소설 〈무진기행〉을 다시 읽으면서 어쩐지 친구 L을 생각하게 된다. 사업을 하느라 늘 이리 쫓기고 저리 쫓기는 모습에서 만약 무진과 같은 일탈의 곳이 있다면 보내주고 싶은 심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매월 말일이면 마감돈 때문에, 세무신고 때문에 진땀 흘리는 것을 항상 보아왔기에 말이다. 그러는 L이 며칠전에 찾아와서는 살고 있는 아파트를 팔려고 내놓았다는 것이 아닌가. 어렵사리 마련했던 아파트 한채, 그 마저 팔고 셋방으로 들어 간다면 이제 영원히 내집마련은 어렵지 않겠나 하는 걱정이 앞섰다. 영문을 물었더니 은행빚이 목까지 차 올라 이자가 원금을 추월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카드 몇개로 이리저리 돌리고 했으나 이제 그것도 한계가 왔다는 것이다. 그의 과거를 돌아보면 그처럼 진실된 삶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L이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채용시험에서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합격했을 때 주위에서 다들 놀랐다. 교수의 도움도 없이 또 그 회사에 아는 사람하나 없이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회사에 다니면서 결혼도 하여 달콤한 신혼생활도 시작되었다. 몇 년을 부서 책임자로 일하면서 성실, 그것 하나뿐인 직원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작스런 사표는 또 한번 주위를 놀라게 하였다. 사표의 이유는 불필요한 대인관계를 거부한 나머지 일어난 불편함 때문이었다. L은 담합이나 부정을 거부하는 정통파였기 때문이다.

 그후 낙향하여 시골에서 돼지와 소를 먹이는 막일을 시작한 것에서도 그 친구의 참된 천성을 잘 알 수 있다. 직접 막사를 짖고, 온돌방도 넣고 아이들을 키우면서 집앞에 작은 꽃밭하나 만들어 놓은 것을 늘 자랑하였다. 별다른 욕심없이 그렇게 꽃이 피고지는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 뿐인 친구다. 그러한 친구가 어느날 판매 사업을 시작했는데, 흥미를 점점 가지더니 이제껏 15년을 그 사업에 매달리고 있다. 본사의 참된 경영과 제품의 우수함에 빠졌다는 것이 그 이유다.

 판매 수입과 지출 그리고 세금계산과 본사 통보 등 매일같이 꼼꼼히 정리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약간의 세금포탈이나 거짓 영수증 하나도 용납 할 수 없으며 본사 송금은 날짜 한번 어긴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친구에게는 진실만이 통하는 것, 그런데 어찌하여 오래전 사업 때문에 낸 은행빚이 갚아지지 않을까? 이렇게 진실되게 사는 친구가 어찌하여 일어서지를 못하는 것일까? 마음이 답답할 뿐이다. 어떻게 보면 이것이 이 사회의 의문점이 아닐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L, 오늘밤 함박눈이 소리없이 내리고 있네 무진의 안개처럼, 모든 일 접어 놓고 잠시나마 무진으로 여행이나 떠나지 않겠나? 그 아름답고 몽환적이며 탈속적인 공간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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