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읍리(錢邑里)는 조선초기부터 돈마을 즉 회은촌이라 불렀던 곳이다. 경주군 외남면에 속할 때는 너부(仍甫)에 딸린 마을이었다가 정조 때 처음으로 독립되어 전읍리가 되었다. 신라 때 돈을 만드는 주전소가 있었다는 설도 있고 실제 전읍리는 "돈말"이라 불리던 곳이기도 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 역원조에 회은촌원으로 나타난다. 이 회은촌은 이두 표기로서 순 우리말로는 바로 "돈말"이 된다. 회(回)는 "돌"로서 "ㄹ"이 탈락되며, 은은 "ㄴ"으로, 회은은 곧 "돈"이 되고 촌(村)은 마을이 줄어서 "말"이 되는 것이다. 경주읍지인 동경잡기에는 회은촌을 혹 전읍이라 이른다고 되어있다.

 전읍리 일대에는 청동기시대 주거지가 있으며, 유촌 서쪽 산에는 쇠붙이와 깊은 관련이 있는 구충당(求忠堂) 이의립(李義立)의 묘가 있다.

 구충당은 1621년(광해군 13) 전읍에서 출생하였다. 1657년(효종 8년) 농소면 달내의 철광을 재발견하여 이를 개척하였으며, 쇠의 제련법과 유황의 자조법을 해득한 선구적인 과학자이며 실업가였다.

 이의립은 효행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인조 14년, 그의 나이 18세 되던 해에 첫 아들을 얻었는데, 때마침 그의 부친이 위독함으로 손가락을 잘라서 생명을 구한 것은 가히 전설적인 이야기가 되어있다. 이윽고 그의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다하지 못한 효도를 나라사랑으로 승화시키기에 이른다.

 그는 우리나라에 철과 유황이 없을 이유가 없다며 "내가 지성으로 팔도강산을 답사하여 탐광을 해서 병농(兵農)에 도움이 되게 하리라"하고 결심한지 10여 년, 마침내 1657년(효종 8년) 농소면 달내의 철광을 재발견하였다. 39세 때 군사용 무기와 농기구 제조에 필요한 철과 유황의 제련법을 왕에게 바치니 현종은 그에게 동지중추부사를 제수하였다.

 울산의 쇠 생산은 멀리 삼한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변진지방의 쇠는 특히 유명하여 삼한 사회는 물론 동예와 왜국에서도 무역을 해갔으며, 낙랑과 대방을 거쳐 중국에까지 공급되어 모든 매매에 있어서 마치 화폐와 같이 통용되었다 한다. 달천의 쇠는 화봉동 서당골 점터를 비롯하여 100여개의 쇠부리 유적을 만들어 놓았다.

 최근에 로또복권에 대한 열풍이 너무 뜨거워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복권 역사상 유래 없는 거액으로 이름그대로 벼락부자가 날 것 같다. 어린아이들조차 설날 세뱃돈으로 로또를 샀다는 이야기가 들린다.

 돈을 찍어내던 전읍마을에서 태어난 이의립은 젊은 나이에 지배계급으로서의 호강할 기회를 버리고 효를 향한 덕행과 국가에 충성할 길을 찾으며 한평생을 보냈다. 한탕주의에 들떠있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의립의 일생이 혹시 귀감이 되지는 않을는지.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