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학무-‘악학궤범’에 기록된 ‘탈학춤’

악학궤범에 유래는 없고 연희순서만 기록 학무 시원 고증 아쉬움
울산 학성의 ‘계변천신 설화’ 쌍학이 탈 학춤의 기원으로 추정
신라시대 설화 기반으로 고려기 학무 창출 조선시대 형식화 한듯
▲ 현재학무(현재 국립국악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탈학)
우리나라 학문화(鶴文化)에는 학춤, 학무, 학작법 등 3종류의 학춤문화가 있다. 이들 셋 가운데 유일하게 탈 학춤인 학무는 <악학궤범(1493)>의 문헌자료로 나타난다. <악학궤범>은 조선 제9대 성종 24년에 성현(成俔) 등에 의해 편찬한 우리나라 음악서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학무의 연희순서만 기록되었을 뿐 발생의 동기를 알 수 있는 중요한 근원에 관한 내용은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아직까지 학무의 시원, 창작자에 대한 연구는 전무한 실정이다.

시원과 창작자가 중요한 이유는 현재 전승되고 있는 학무의 정체성과 진실성 그리고 합당성을 규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척 다행인 것은 학무가 향악정재(鄕樂呈才)로 분류되어있다는 사실이다. 향악정재라는 표현은 당나라 음악을 의미하는 당악정재(唐樂呈才)가 아닌 우리나라 독자적 음악을 지칭하는 구분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류의 자료는 향악(鄕樂)이라는 용어 사용에서 신라시대에 이미 민간에서 학춤이 창출되어 전승되고 있었을 개연성을 추정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또한 이러한 자료는 우리나라 학춤문화 전반을 연구하는데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중요하다하겠다.

학무는 학모양의 탈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연희하는 탈춤인 까닭에 동작에 제약을 받아 단순동작으로 나타난다. 학탈춤은 주로 궁중에서 임금에게 정재(呈才)로 연희되었다. 정재는 ‘드린다’, ‘올린다’ 등의 의미

▲ 교방가요학무(교방가요에 그려진 탈학)
로 조선시대 궁중 어전(御前)에서 연희되었다.

그래서 ‘궁중학무(宮中鶴舞)’ 혹은 ‘정재학무(呈才鶴舞)’ 등으로 이칭 된다. 정재는 당악의 영향을 받아 민속춤에 비해 매우 형식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민간에서 정재의 학무를 볼 수 있는 기회는 없다. 현재도 국립무용단, 국립국악원 등 정기 공연 때 간혹 볼 수 있을 정도로 일반화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현실에서는 시의성에서 정재의 형식과 연희의 단순함 그리고 소품인 대형 학탈의 운반 등이 일반화되지 못한 이유가 아니겠는가 생각된다.

학무라고 부르는 탈 학춤은 현재 <악학궤범(1493)>에 기록된 ‘학무’와 한성준이 창작한 학무 등 두 가지이다. 이번에는 <악학궤범>에 기록된 학무를, 다음 연재에는 한성준 창작학무를 살펴보겠다.

<악학궤범>에서 학무가 향악정재로 분류 기록된 것은 우리나라 학춤문화의 학무사(鶴舞史)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열쇠말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학무의 시원에 대한 접근은 향악정재로 분류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이 당악정재에 나타나는 연화대에 집착해 관습적으로 인용 답습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필자는 우리나라에서 학무의 기원을 탐구해야 한다는 점을 이미 1998년도부터 지금까지 일관되고 지속적으로 논문에서 제시하고 학술세미나에서 발표하고 있다. 이러한 증거는 본보(1998년 7월23일자 보도)에 기사화되었다.

왜 학무의 기원이 이렇게 중요한것인가?

첫째, 지금까지 설왕설래하는 우리나라 학춤문화의 정체성과 학무로서의 진위 여부를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 악학궤범 학무(악학궤범에 그려진 탈학)
둘째, 우리나라의 독창적 학춤문화의 우수성을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알림으로서 우리나라 국민이 수준 높은 문화를 향유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우리나라 학춤문화연구에 있어서 지금까지 아진인수식의 해석을 종식시키고 나아가 학춤문화의 진정한 가치성을 제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 여러가지 기대효과가 있을 수 있으나 논외로 하겠다.

<악학궤범> 제5권에는 성종 조(條)에 연희된 <향악정재도의>에는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봉래의(鳳來儀), 아박(牙拍), 향발(響발?), 무고(舞鼓), 학무(鶴舞), 학연화대처용무합설(鶴蓮花臺處容舞合設), 교방가요(敎坊歌謠), 문덕곡(文德曲) 등 10종을 기록하고 있다.

그 가운데 학무와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순서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악관이 보허자 영을 연주하고, 제기는 노래한다. 박을 치면 청학. 백학이 나는 듯이 발을 디디고 지당판 앞에 나아가 동서로 나뉘어 북쪽을 향하여 선다.(중략)박을 치면 연통을 쪼아 열고, (그 속에서) 두 동녀가 나오면 두 학이 놀라서 물러간다.’

소개한 것과 같이 기록에는 학무에 대한 유래는 없고, 다만 연희순서만 나타난다. 학연화대처용무합설의 학무 부분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한국음악사에서 학무의 기원을 일반적으로 중국의 탁발위(拓跋魏) 연화대(蓮花臺)에서 그 영향을 받았다는 추정이 관념화되어 관습적으로 답습인용하고 있다.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계변천신 설화’가 우리나라 탈 학춤 즉 학무의 기원 설화라고 1999년도에는 <울산문화 제15집>을 통해 발표했다. 필자의 제기에 대한 더 이상의 증거자료와 이론을 지금까지 학계로부터 제기 받아본 바 없다.

필자가 학무의 기반연기 설화가 학성의 계변천신 설화에서 기반을 두었다고 제기하는 이유도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64호 ‘학무’(1969)>에서 밝히는 역사적 유래를 살펴보면 이해가 더 잘될 것으로 본다.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학무에 관한 문헌은 전혀 찾아볼 수 없어서 이 춤의 역사적 유래를 밝혀보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춤에는 연기설화가 있기 마련이다. 따라서 학무에 무원(舞員)이 2명인 것과 계변천신의 쌍학(雙鶴)이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결국 신라시대 학성에서 발생한 계변천신 설화가 기반이 되어 고려시대에 학무가 창출되었으며, 조선시대에는 형식화되어 정재로 활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김성수 울산학춤보존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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