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인가 소설이 사라졌다.

 예전엔 여성지 뒷부분에도 소설 작품이 매월 연재되었고 신문마다 연재소설이 실렸다. 달마다, 혹은 날마다 연재소설을 읽느라 신났던 시절, 어떤 때는 그 길다란 하루치의 신문소설을 정성스레 오려서 모은 적도 있었다. 그러던 것이 어느 사이, 슬그머니 소설들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소설의 효용가치에 대한 회의가 있었을까, 여성잡지에서는 연재소설이 사라진 자리에 아름다워지는 화장법이나 남편 바람기 잡기, 즐거운 성생활 따위의 글들이 실렸고 신문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아쉬워하는 이도 별로 없는지 그렇게 없어진 소설은 지금도 몇 신문사를 제외하곤 여전히 행방불명이다. 바쁜 세상에, 긴 글을 읽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생각했을까?

 소설이 사라진 데는 분명 작가들의 잘못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잘못만으로 단정짓기에는 사람들이 너무 글을 읽지 않는다는 현실을 슬퍼해야 한다.

 그러잖아도 골치아픈 세상,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느라 사람들은 사유(思惟)의 즐거움을 스스로 포기한 듯하다.

 "소설가"라는 이름을 갖고 살면서, 출판 홍수시대라는 요즘에도 작품집 한 권 갖지 못한 소설가들이 많다. 활자 공해를 일으키는 일원이 되기 싫다든지,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등의 이유를 대지만 사실 그들이 작품집을 내지 못하는 이유는 두려워서일지도 모른다.

 "대체 뭐하는 짓인지 몰라. 자다가도 벌떡 깨어서 실소를 머금는다니까."

 어느 소설가의 자조어린 말이 그 어느 때보다 아프다. 소설가. 한 때는 경외의 마음으로 되뇌었던 단어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소설 쓰는 사람들을 보면 측은한 마음이 앞선다. ‘어쩌다 그 고통스런 일을"’ 말 줄임표로 남은 감정은 애써 삼켜버린다. 소설을 써서 유명한 작가가 되어 돈도 벌고 명성도 얻는 이들이 더러 있지만 그러한 이들은 정말 ‘가뭄에 콩 나듯’한다. 그러한 소수 작가들 외에는 소설이 생존의 방법이 될 수 없으므로 어둡고 지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업(業)’이란 단어를 생각하고 있지나 않은지. 용불용설(用不用說)을 문학에 대입해도 된다면 소설은 퇴화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해 연말쯤에 소설동인지가 나와서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나누어주었다. 그런데 책을 받아든 어떤 이가 하는 말이 머리를 띵하게 했다.

 "힘들여 쓰고 책 만들어서 공짜로 나누어주면 어떻게 해요? 난 공짜로 받아서 좋긴 하지만 안타까워요."

 힘들여 쓴 글을 모아 책을 만들고 그것을 공짜로 나누어주는 일". 참 한심한 일이다. 그러나 그 앞에서 한숨을 쉴 수는 없었기에 궁색한 변명을 하는 소설가는 슬펐으리라.

 "보시라고 드린 책, 꼼꼼히 읽어 주시는 것도 고맙지요."

 광고가 없고 지명도가 없으면 책은 팔리지 않는다. 따라서 읽지도 않는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그래도 양호한 독자다. 최소한 한번은 그 책을 읽을 테니까. 그래도 소설을 아끼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실망하지 말고 소설을 써요. 인간이 존재하는 한, 소설은 존재할 테니.”

 이야기에 대한 욕망, 소설은 고독하고 소외된 현대인의 존재론적 상황과 삶에 대한 본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던가.

 깊은 밤, 잠 못 들고 고뇌하는 작가가 있으리라. 그들에게 "사라진 소설’은 가설일 뿐이다. 그들은 아직도 소설의 부흥을 꿈꾸며, 허구로써 현실속에 감추어진 이면과 인간의 진실을 이야기하게 됨을 굳게 믿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사그라져가는 소설의 불씨를 다시 지펴내는 일에 스스로 불쏘시개가 되려 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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