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전리(川前里)는 본래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다. 남천(南川)의 상류인 만당걸이 마을 앞을 흐르므로 내앞이라 하였고, 이를 한자로 표기하여 천전리가 된 것이다.

 천전석불(川前石佛)은 천전리 용화사(龍華寺)에 있는 미륵불이다.

 조선시대에 현역군인이라 할 수 있는 번상군(番上軍) 복무를 위한 경비를 염출하기 위해 번상하지 않는 대가, 즉 현역으로 복무하지 않는 대신 군포(軍布)를 징수하였다. 포 2필을 바치는 이 제도는 후에 국방보다는 국가재정의 충당으로 제도로 변질되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더구나 단일 관청에 의한 통일된 행정이 아니라 5군영, 중앙정부, 지방감영,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징수함으로써 장정 한 사람에게 이중삼중으로 부과되고, 어린아이를 어른 취급하여 부과한 황구첨정(黃口僉丁), 죽은 사람을 살아있는 것처럼 하여 부과한 백골징포(白骨徵布), 인징(隣徵), 족징(族徵) 등의 폐단이 자행되어 원성이 일어났다.

 어느 시기엔가, 언양 현감이 장정들의 이름을 적어 군포를 거둬들이는데, 마을 사람들이 이곳에 있는 미륵을 장정 수에 포함하여 적어 넣었다. 그 후 관아에서는 장정의 수효대로 혹독하게 군포를 거두니 마을 사람들의 원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석불을 장정에 충당하여 우리가 화를 당하는구나’하고 탄식하였다. 이 말이 떨어지자 홀연 석불 어깨 위에 두 필의 면포가 얹혀졌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이 영험한 미륵이라 하여 1843년(현종 14) 용화사를 세우기에 이른다.

 미륵불이란 본래 보살의 상태로 극락정토인 도솔천에서 수도와 설법을 하다가 부처가 되어 석가 입멸 후 56억 7천만년 후에 지상에 내려와 석가모니가 미처 구원하지 못한 중생들을 구제하게 되는 미래적인 부처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지배질서 속에서 불교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억불정책은 오히려 일반민중에게 미륵사상을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고, 현실에 무기력해진 백성들에게 미륵사상은 새로운 세상을 지배하는 구세주의 용화세계로 인도되는 미래신앙으로 자라나게 된다.

 천전리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길가에 멀뚱하게 서 있는 미륵석불이 얄미워 "너희들도 장정 몫을 해라"며 장정 수에 넣었으나 막상 석불에게도 군포가 떨어지자 후회막급이 되었다. 하지만 미륵불은 결코 무심치가 않았다. 모든 중생을 구제할 날은 아득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장 필요한 군포 2필로 자비를 베풀어 민초들의 걱정근심을 없애주었다.

 절대자를 향한 보통사람들의 바람은 거창하지가 않다. 그저 억울함으로 인한 애통함과 잔인한 이별의 슬픔이 없는 평화로운 일상을 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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