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 사회는 지역적인 대결구도와 정치적인 편중을 뛰어넘은 실험의 현실적인 결과에 대해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새로운 대안에 대한 기대감으로 一喜一悲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희일비를 가져오는 의사 결정의 이면에는 우리가 미처 정립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하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지금까지는 우리가 경제를 생각하거나 이와 관련된 의사결정의 기준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경제성"원칙이 절대적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지난 60~80년대 한국경제의 급속한 성장을 이끈 원동력의 개념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직이 커지고 집단이 많아지면서 규모와는 별로 관계없이 일관적인 기준이 적용되는 "경제성"원칙은 집단간이나 조직간 이해의 충돌을 가져와 동질적인 소속감이나 문화의 정체성에 틈이 생기는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의사결정의 "경제성"원칙은 국가라는 틀에서 보면 계속해서 유효한 원칙이 되지만, 그 사회의 내부에서는 하나의 통일된 문화나 정서 또는 동질적인 욕구만족에는 한계를 가져오는 기준이 되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안정을 위해 이러한 한계를 넘어 여러 집단이나 조직간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의사결정의 기준이 필요한데, 90년대부터 우리 사회에는 이러한 기준의 결여로 인한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기준을 찾기 위한 사회적인 실험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우리가 필요한 기준을 쉽게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은 내부적으로는 "기득권"이라는 이익집단이, 그리고 외부적으로는 "북한"이라는 집단이 계속해서 방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새로운 기준으로 제안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경영"의 개념이다. 경영은 일반적으로 기업이라는 이익집단에서 장기적인 목표를 향해 발생하는 집단간 또는 조직간의 균형적인 의사결정으로 지금까지의 "경제성" 기준에 따른 의사결정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경제성" 기준은 천재적인 지식이나 지혜를 가진 이성적인 판단이 중요한데 비해 "경영"의 기준은 천재적인 능력에 의한 이성적인 판단뿐만 아니라 이해관계자간의 정서와 이들을 포용하며 사회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도덕성 등이 어우러진 감성적인 판단이 중요하다. 특히 기업의 매니저에게는 이러한 이성적인 능력과 감성적인 판단력이 함께 조화될 때 구성원에게 리더십이 생기게 되고 이런 결과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사회의 구성원으로 존재할 때는 자기의 분야에 필요한 천재적인 지식이나 지혜를 향상시키는 노력으로 이성적인 판단력을 키우는 것이 중요한 일이지만, 나아가 사회의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이성 못지 않게 필요한 것이 포용력과 도덕성이다.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라 과거 문제 해결을 위해 지식이나 지혜가 주요한 요인이었다면, 지금은 이해당사간의 대화와 토론에 의해 어느 일방의 절대적인 승리나 패배보다는 상대방의 이해와 전체적인 조화 속에서 문제 해결의 절충 점을 찾아야 한다. 따라서 "누구는 토론의 프로고 우리는 아마추어"라는 이야기는 곧 나 자신이 새로운 패러다임의 변화에 따른 준비가 없었다는 자인과 무책임을 인정하는 결과라 하겠다.

 아무튼, 우리 사회는 90년대를 지나면서 이전의 "경제성"논리에 의한 의사결정의 기준은 이해 관계자간의 적절한 균형점에서 의사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영"의 기준으로 패러다임이 변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우리 사회가 안정되고 계속해서 발전하기 위해서는 제도나 규칙의 양산보다는 이러한 의사결정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을 배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기 위해서는 사회가 요구하는 천재적인 능력만을 고집하고 육성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올바른 이성적 판단력과 도덕심, 나아가 상대방을 배려하고 전체 조직을 이끌 수 있는 리더십 교육을 위한 인성교육이나 인문학의 활성화가 필요하다. 세계의 다양한 문화를 접하면서 삶의 아름다움이나 어려움을 느끼고,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수용할 수 있는 똘레랑스(tolerare, tolerance)를 통한 다양한 감수성도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교육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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