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백년 전 사람들이 태어나서 제일 먼저 세상을 내다본 것은 창문이었다. 그러나 요즘 어린이가 제일 먼저 바깥세상을 내다보는 것은 TV이다. 아예 텔레비전이 있는 분만실에서 태어난다. 그래서 TV를 "세상을 제일 먼저 내다보는 창"이라고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TV를 보고 안다. 가을·겨울이 가고 봄·여름이 오는 것도 텔레비전을 보고 느낀다. 사람들은 찌푸린 하늘이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고 우산을 준비한다.

 TV는 이제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의사환경(pseudo environment)’의 창조자이다. 그래서 TV를 그 편재성(遍在性)이나 전지전능한 특성에 비유하여 "제2의 신"이라고까지 한다.

 그에 비해 메리윈은 텔레비전을 "보는 마약(the plug-in drug)"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플러그를 꽂아 화면이 나오자마자 마약과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TV는 "폭력학교"라는 오명을 덮어 쓰기도 했다. 이 폭력성과 함께 최근에는 선정성까지 덮쳐 텔레비전의 얼굴은 성할 날이 없다.

 이처럼 포폄(褒貶) 가운데서도 현대인들은 텔레비전을 버리지 못하고 오히려 끼고 산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텔레비전은 욕을 얻어먹는 것만큼 그렇게 불량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텔레비전을 통해서 정보와 문화와 오락과 경제적 이득을 얻는다. 인류 역사상 지난 50년 동안의 TV만큼 사람들을 많이 울리고, 웃기고, 화내게 하고, 감동을 준 매체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텔레비전에 중독 되었고, TV화면의 이미지에 굶주려있다. TV가 정치를 한다고 해서 텔레-크레시(Tele-cracy)라고 하고, TV가 외교를 하고 스포츠를 하는 것쯤이야 누구나 안다. TV가 대통령을 뽑고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텔레비전 때문에 힘을 쓴다.

 그런데 요즈음 TV는 더 바빠졌다. 전쟁실황중계 때문이다. 최근 일주일동안 시청자들은 원래 TV중계의 주역인 스포츠나 문화행사 중계보다 전쟁중계를 더 많이 보고 있다. 이라크 전쟁은 10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TV가 하고 있는 느낌이다. 느낌이 아니라 실제가 그렇다. 시청자는 TV를 통해 전쟁상황을 일지처럼 보고 듣는다.

 전쟁의 뉴스는 전쟁당사국들의 이익과 운명이 걸려 있어서, 과장되거나 의도적으로 조작된 오보들이 심리적 목적으로 양산되기가 일쑤다. 이해 당사국들이야 당연히 흥분할 수밖에 없겠지만 우리는 그들이 취재경쟁으로 제작해 내는 흥분된 뉴스를 언제까지 무차별적으로 사용하기만 해야 하는가. 전쟁의 정보는 언제나 그리고 분명히 공익적 가치를 가진다. 그래서 누구나 생생하고 정확한 정보를 알 권리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생생하고 정확한"은 "잔인하고 비참한"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드라마 속의 파괴와 살상은 허구이고 연기이다. 그러나 전장의 그것은 연기나 오락이 아니다. 차라리 드라마는 시청연령을 제한하는 등급제라도 있다. 예를 들어 ⑮라고 자막처리를 하면 열다섯 살 이하의 시청을 제한하거나 주의를 요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전쟁실황은 무엇인가. 누구나 보아도 좋은 무제한 등급인가. 아니면 권장 우수 프로그램이라도 된단 말인가.

 피할 것은 피하고 보여줄 것은 보여주는 것이 보도의 최소한의 윤리일 것이다. 불탄 시체, 피투성이의 어린이, 겁에 질린 여인의 얼굴, 이것이 어찌 선정적이고 폭력적이라는 이유로 방송을 금지하고 있는 섹스나 격투의 장면보다 괜찮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버젓이 방송이 될 수 있는가. 사랑의 장면은 차라리 비도덕적일지언정 전쟁처럼 비인간적이지는 않다. 전쟁생중계는 결코 불꽃놀이나 더더욱 컴퓨터게임은 아니다. 전쟁은 인간이 생각해 낸 최악의 폭력이고, 그 속에는 공포와 충격, 파괴와 죽음이 다 들어 있다. 그야말로 인간이 비참해질 수 있는 극한상황과 잔인해질 수 있는 마지막 폭력을 그대로 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서 특히 청소년들이 자기도 모르게 도전적이며 잔인성을 기르고, 결국에는 죄책감마저 상실한 비인간적인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사람들은 이제 TV를 보면서 사회화된다. 지금부터라도 자제와 절제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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