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동하는 만물에서 환희를 느끼며 희망의 찬가를 소리높여 불러봐도 좋을 사월. 삼라만상이 깨어 세상 온천지 초록의 빛으로 눈 부시고 목련, 개나리, 설유화, 산수유는 제 살을 갈라 저리도 아름다운 꽃을 피워 내었구나. 산골짝 여기저기서 피어나는 진달래의 자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이 눈길을 붙들어 맨다.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이 활짝 기지개를 켜고 형형색색의 사람의 물결을 만들어 내고 아름다운 산과 계곡 그 자연의 품에 안기운 채 한껏 자기를 살찌우는 이 완연한 봄은 생동의 계절이 확실한 듯하다.

 우리 인간이 어제 산허리를 배여내고 오늘 물을 흐려놓아도 자연은 우리에게 어김없이 파란 새싹을 틔워내고 예쁜 꽃을 피워내어 우리에게 이치와 도리의 약속을 말없이 지켜낸다. 이렇게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이 향연에 우리는 그 감사의 보답으로 이리도 시끌벅적하게 상춘한단 말인가.

 그런데, 삼삼오오 무리 무리의 사람들 속에 혼자 걷기 어려운 아이는 엄마 아빠 손을 잡고 걷고 더러는 등으로 가슴으로 아이를 업고 안고 그리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온갖 치장을 한 강아지조차 따라 나선 풍경이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상춘의 풍경 아니던가. 그렇지만 그 가운데 혹시 지팡이를 짚고 또는 손주 손을 잡고 또는 가족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걷는 노인들을 찾아 보기란 사실 어려운 일이다.

 노인들은 봄을 맞이하려는 감정과 정서가 메마른 탓일까, 기골이 쇠해 바깥 출입의 욕구조차 쇠해 버린 탓일까. 우리 모두는 이에 대해 묻고 대답하는 것조차 부질없이 어리석은 짓이 아니겠는가.

 이 시대의 노인은 누구인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혼란하고 어려웠던 시기를 살아온 사람들이다. 일제의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나라잃은 설움을 뼈저리게 느끼며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성장기를 보내고 그러다 해방을 맞이하지만 6·25 동족상잔의 아픔을 겪고 남북 대립의 긴장 속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다. 허리띠를 졸라매며 보리고개의 배고픔을 이겨내면서도 자녀의 양육과 국가발전을 위해 헌신하며 희생적으로 살아왔다. 그러나 자신들의 노후 준비는 손끝만큼 할 겨를없이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한 집안의 가장으로 동네의 어른으로 그리고 사회 지도자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유지하여 왔다. 그러나 최근 산업화 도시화 핵가족화 등의 급속한 사회변화 과정에서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은 저하되거나 소멸되고 가정이나 사회에서 제대로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하는 소외 집단으로 전락하고 만 게 아닌가.

 나는 여기 쯤에서 참회하고픈 심정이다. 복잡한 법조항의 근거를 여기 열거하지 않더라도 국민으로서의 기본권을 가지고 건강하고 안정된 생활을 유지하며 국가의 보호를 받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보호막의 역할과 기능이 아직 제대로 작동되지 않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자식 두지않은 부모는 있지만 부모 없는 자식은 없지 않은가. 이 땅의 자식들이 함께 고민해 볼 일이다. 오늘, 혹시 부모 혼자 빈 집에 남겨 둔 상춘이라면 돌아가는 길에 봄내음 물씬 풍기는 산나물이라도 장을 봐서 밥상에 올려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이 봄이 가기 전에 한번 더 짬을 내어 달력에 동그라미 하나 더 그려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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