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대구 지하철참사를 이제 잊으려 하고 있다. 소외된 한사람의 삐뚤어진 마음이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어처구니없는 사건 앞에서 좌절과 분노를 느꼈던 우리가 이제 그 사건을 잊으려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참사가 왜 일어났을까 조용히 눈을 감고 자성의 시간을 가져야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90년 초 택시운전기사로 그리고 한사람의 가장으로 열심히 일하다 병을 얻고 반신불수가 되고 이러한 과정에 누구하나 관심을 보이지 않는 냉정한 사회에 불만과 허탈을 느끼고 이 사회에 분노에 차 오른 복수를 하고자 작심한 사람이 지하철 안에서 무고한 생명들에게 불을 지폈을 때 이웃이라는 우리는 어디에 있었고 무엇을 했는가?

 우리 정부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만들어 가난을 구제하려 하지만 사회안전망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국가는 빈곤선 이하의 모든 저소득층에게는 근로능력에 관계없이 최저생활을 보장하려 했으며 저소득층에게는 스스로 빈곤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자활지원서비스를 제공하여 생산적 복지를 구현하려 애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그 스스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고 그 결과가 바로 국가주도 복지정책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노정시키고 있다. 국가가 개입해서 불평등을 시정하고 빈곤을 퇴치한다거나 정부가 전면에 나서서 의료와 복지혜택을 분배하고 증진시키려는 정치공학이나 사회공학의 시대는 이제 끝장났다는 것이 미래 학자들의 주장이다.

 이제 더 이상 정부가 만병통치약과 같은 존재일 수 없다. 정치도 사회도 다원화하고 있는 지금 정부는 전체사회의 한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 지금과 같은 시대조류에서는 정부의 역할에 한계를 느끼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기조차 하다. 중세유럽시대에서는 신앙에 의한 구제를 하였다면 현재는 사회질서에 의한 구제이다. 오늘날 다원사회의 여러 조직과 기관들이 해야 할 일은 전체 사회의 이익에 대한 관심과 책임을 자기 자신들의 비전과 자세, 그리고 가치관 속에 내면화하고 확립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하는 공동체 사회구현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우리에게 희망으로 다가온 나눔과 용서의 21세기가 극심한 이기주의와 무질서에 의해 오염되고 있는 일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현재 우리 앞에 펼쳐지는 지식정보화 사회는 인간가치보다 물질을 우선시하는 경향과 풍조를 낳았고 이러한 가치편도의 현상은 나와 내 가족의 행복이 외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풍조가 당연시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고 인간성의 말살을 낳고 말았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 모두는 나와 내 가족이라는 이기적 가치를 버리고 사회전체의 공동체 의식 고양에 앞장을 서야 하며 더 나아가 한 민족 일치와 화해에 중심을 둔 사회를 만들어 나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 왜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사람이 지하철 안에서 불을 지필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왜 그가 그토록 사회에 대해 증오를 하고 왜 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분노의 불화살을 당겨야 했던가하는 점을 대구 지하철참사를 통해 우리 모두는 뼈아픈 교훈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사회가 책임지는 복지가 이루어지고 나보다 이웃을 더 사랑하는 그런 사회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러한 인격파탄적 그리고 정신병적인 반사회적 범죄들이 계속해서 일어 날 수밖에 없을 것이고 바로 그러한 반사회적 범죄의 희생자는 바로 우리 자신이 될 것이다.

 청년들의 노래 말 중에 "신앙은 인간생활의 의의와 목적을 부여하며, 인류에의 봉사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사업임을 우리는 믿는다"는 정말 희망적인 노래 말과 같이 우리가 하나되고 더불어 사는 이웃이 있을 때 우리는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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