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리(禾亭里)는 서생면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신라 때는 샛내(生西良?東安), 조선 예종 때는 ‘술이리’라 하였다. 정조 때는 수마리(禾麻里)라 하였다가 1914년 수마동과 구정동을 합하여 화정리가 되었다. ‘수’가 변하여 화정동이 된 것이다. 즉 ‘술마’를‘수마’라 한 ‘화’와 구정의 ‘정’을 따서 절충식으로 지은 이름이다. 화정리 술마(述麻)마을은 군사적 요충지로 신라 때부터 숙마진(熟麻鎭)을 두어 나라를 지켜왔고 그 거대한 산성지는 지금도 볼 수 있다.

이곳 화정리에서 강양(西湖)으로 건너가려면 돌다리를 건너야 했다. 이 다리는 강 속에 자연적으로 있던 돌 중간 중간에 다시 돌을 놓고 둥글게 무더기로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 나무를 놓아 사람들이 건너다니게 한 다리로서 통시다리다. 돌에 굴(石花)이 많이 붙어 서식하므로 꿀다리라 하였다. 꿀은 굴의 방언이다. 지금은 서생교가 생겨나고 또 돌들이 많이 유실이 되는 바람에 다리의 역할을 못하고 있으나 그 흔적은 찾을 수 있다.

한편 화정리 앞을 흐르는 회야강의 하류를 일승강이라고 부르는데, 그 이름은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조명연합군이 왜군을 크게 무찔러 이겼던 데서 유래한다.

제1차 도산성 싸움 때의 일이다. 조명연합군이 죽을힘을 다해 성을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다. 성이 워낙 험한데다 적들은 조총과 화살을 비 오듯 퍼부어 댔고 날씨는 얼어붙어 동상자가 속출하였고 군사들의 사기도 극도로 저하되어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적군의 응원군은 수륙양면으로 몰려오니 자칫하다가는 적에게 포위될지도 모르는 위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리하여 조명연합군은 천추의 한을 품고 경주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경주로 물러선 연합군은 다시 적을 칠 계책을 세웠다. 당시 서생포의 왜성은 거의 빈 성이나 다름없었다. 쓸만한 군사들이 모두 울산 도산성에 구원병으로 출동하고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야말로 허를 찔러 서생포 왜성을 쳐서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 줄 때라 판단하여, 명나라 장수 오유충과 조승훈은 결사대 20인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물론 지리에 밝은 울산의 군사 몇 사람이 앞장서서 길을 인도하였다. 이들 결사대는 야밤에 생초로 잠입하여 회야강에 있는 조교에서 마침내 적을 만났다. 이 때 명장 이춘방이 급히 다리를 끊어 왜병을 수장하는 동시에 다리 넘어 건너 온 적군의 목 100여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경주 본진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승전이 있은 뒤로부터 화정리 일대의 회야강을 일승강이라고 불렀다.

이후로 이 꿀다리에 손을 대면 전쟁이 일어나고, 또 그 전쟁에서 이기게 되며 그 뒤에 평화가 찾아온다는 말이 전해져 오고 있다.

미국이 이라크를 공격하여 수많은 사상자가 생기고 있다. 석유가 원인일수도 있고 종교전쟁이라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언제나 힘없는 여자와 아이들에게 죽음처럼 극심한 고통을 주는 것이 전쟁이기에 피하는 한 끝까지 피해야 한다. 꿀다리를 물속에 흩어버린 데는 그런 깊은 뜻이 숨겨져 있다. 통시다리의 영험한 힘을 믿고 이 땅에서 전쟁을 일으키고 또 이겨보겠다는 욕심을 품는 대신 새로 만든 서생교를 통해 평화의 전령들이 오가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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