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이 5일 감행한 바그다드에 대한 전격 진입 작전은 지난 1982년 이스라엘군이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축출을 위해 베이루트를침공한 과정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 이스라엘의 목표는 북부 갈릴리 지역을 위협하고 있던 PLO를 뿌리뽑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과 영국도 대량살상무기로 서방의 위협으로 간주되는 사담 후세인 정권 축출을 목표로 하고 있다.

 미군이 이날 포위·압박을 통해 후세인 대통령의 항복을 받아내기 위해 바그다드를 급습한 장면은 당시 PLO 의장이던 야세르 아라파트를 몰아내기 위해 베이루트를 침공한 것을 연상케한다.

 갈릴리를 위한 평화라고 명명됐던 이 작전은 1982년 6월6일 이틀간의 대대적인 공습 뒤 탱크을 앞세운 지상전으로 시작됐고 열흘 뒤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 남쪽 외곽에 위치한 베이루트공항까지 진격해 들어갔다.

 이어 7월초 이스라엘군은 레바논 기독교 민병대와 합세, 베이루트의 동·북부를 확보했고 서부는 이스라엘 해군이 제해권을 확보함으로써 베이루트는 함락됐고 이스라엘군의 베이루트 점령은 88일간 계속됐다.

 이에 맞서 1만2천여명의 팔레스타인 전사와 수천명의 레바논 좌파 민병대들은 베이루트 시내와 남부 근교에서 6만여명의 이스라엘군에 대항했다.

 미국은 피의 대학살을 우려, 이스라엘이 전면전을 감행하지 못하도록 하고 대신 아리엘 샤론 이스라엘 국방장관에게 정보기관이 제공하는 첩보에 따른 공습으로 아라파트를 제거하도록 했다.

 그러나 아라파트는 밤과 낮으로 끊임없이 움직였으며 몇차례의 폭격을 간신히 피하는 등 구사일생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대신 수백명의 민간인들이 공습에 희생됐고 수만명이 이스라엘 전투기가 살포한 전단에 나온 지시대로 피란길에 나서야 했다.

 이스라엘은 베이루트 시내의 수도와 전력 공급을 끊고 이미 식량과 기름이 동이 난 이 도시에 대해 대대적인 공습을 벌였다.

 아라파트와 그의 측근들은 8월21일과 9월3일 사이에 미국의 특사인 필립 하비브가 주선한 프랑스 전함을 타고 베이루트를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스라엘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으나 이란의 새 이슬람공화국 지원 아래 시리아가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면서 레바논 완전 장악에는 궁극적으로 실패했다.

 이스라엘군은 9월15일 베이루트 서쪽으로 진입했으나 다음 날 당시 레바논 대통령 당선자로 친 이스라엘계 민병대 지도자였던 바시르 게마옐이 암살됐다.

 친이스라엘계 기독교 민병대는 이스라엘군의 뒤를 따라 베이루트 인근 사브라및 차탈리아 난민 캠프에 대한 학살을 감행했다. 이 학살사건으로 샤론과 이스라엘의 이미지는 극도로 나빠졌다.

 레바논 게릴라들은 베이루트내 이스라엘군에 대한 공격을 시작, 이스라엘 당국자가 대낮에 인적이 많은 함라거리의 커피숍 도로에서 살해되기도 했다.

 이후 이스라엘군은 베이루트 장악 11일만에 물러나야 했으며 미국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다국적군이 이스라엘군을 대신해 베이루트에 주둔하게 됐다.

 이스라엘군이 철수한 이유는 도시 게릴라전을 비롯해 자살공격, 인질작전 등이 잇따랐기 때문이다.

 베이루트에 있는 팔레스타인해방민주전선(DFLP) 대변인 수헤일 알 나투르도 미군의 바그다드 진입과 관련, 이스라엘이 1982년 레바논을 전격 침공한 것과 같다고 밝혔다.

 그는 미군이 첨단무기로 무장하고 있지만 레바논 침공 후 이스라엘이 당한 일을 되돌아 봐야한다면서 당시 이스라엘군은 계속된 저항에 부딪혀 철수했다고 지적했다.

 레바논 남부 시돈항에 있는 파타운동 군 관계자도 미국과 이스라엘군이 첨단무기와 전투기는 있다고 하더라도 순교작전을 할 용기는 없다면서 미군의 이라크 침략은 자살공격을 포함한 강도높은 항전에 직면할 것이라고 말했다. 베이루트 AFP·dpa=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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