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억리(登億里)는 일제 초기 등억과 신리(新里)로 갈라져 있다가 다시 두 마을을 합해 등억리가 됐다. 화천(花川) 또는 곶, 혹은 곶내라고도 부른다.

 "등억"에 대해서는 산등성이를 뜻하는 등어리=등억설, 등(登)어귀=등억설, 등악(岳)=등억설이 있으나, 등어귀(산을 오르는 어구의 뜻)의 뜻을 취하고자 한다. 곧 등억의 "억(億)"을 "어귀"의 음차로 보는 것이다. 한편 곶·곶내·화천이라는 이름은, 이 곳 지형이 곶으로 되어 있고, 양쪽에 내가 흘러 부르게 된 이름이다. 행정마을도 등억리 단일마을로 되어 있다.

 등억리 동쪽에 묘하고 아담한 산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고, 이 산 8부 능선에 테뫼식 산성이 있는데, 1998년 10월에 지방기념물로 지정된 언양천리성이다. 이를 세칭 과부성(寡婦城)이라고 한다. 언양읍지에 따르면 성의 둘레가 2천척이며, 성안에 두 개의 우물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상북면은 지정학적으로 왜구의 노략과 임진·정유의 왜란을 통해 어느 지역보다 피해가 컸던 격전지였다.

 신간 상북면지에 의하면, 학성금신록(鶴城衿紳錄) 충의편 유광서조(兪光瑞條)에서 향인 신광윤(辛光胤) 등 뜻을 같이 하는 45명은 하인들과 오늘날의 예비군 및 향토방위군 등 수백명을 규합해 의병을 일으켜 왜병과의 전투에 나섰고, 이에 간월사, 운제사 등의 승려들도 가세했다고 한다.

 이 곳에서는 조총, 화약 등 선진무기를 사용하는 왜병들과 칼, 창, 활, 농기구 등 낙후된 원시 전쟁무기를 든 의병들과의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 조국과 겨레, 향토를 사수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수많은 의병들의 죽음을 각오한 전투는 장렬하고 처절했다. 총을 든 왜적들이 성을 온통 에워쌌고, 성 중의 의병들은 포위한 왜병을 향해 활을 쏘고 횃불과 돌을 던졌으나 거리가 미치질 못했다. 왜병들이 조총으로 마구 쏘아대자 어쩔 도리 없이 의병들은 하나 둘 차례로 쓰러져 갔다. 종말에는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몰살당하고 말았다.

 왜병들이 다른 곳으로 이동해 떠난 후 피신했던 마을 사람들이 성으로 올라가 보니 그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었다. 즐비한 의병들의 시체는 한 구씩 운구해 산에 장사지냈다. 이렇게 묻은 묘의 수가 수백구나 되었다. 이 전투 후 마을에는 몰 과부가 생겨나고 말았으니 이 때부터 세상 사람들은 이 산을 가리켜 과부성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계 최강 미군이 약체 이라크와 싸우고 있다. 첨단무기가 총동원되고 있기에 창칼이나 조총으로 전투하던 옛날에 비해 그 피해규모가 엄청나다. 이라크는 임진왜란 때의 우리 처럼 민병대까지 조국수호에 나서고 있다. 하지만 우국충정에 의한 자발적인 창의가 아니다. 가족들을 볼모로 권총을 들이대 강제로 떠밀려 나간 것이니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 종전 후 아버지 없는 아이들과 남편 잃은 과부들이 힘든 인생을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착잡하다. 지금이라도 서로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방패와 수레를 불살라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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