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은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이었다. 이날은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대외적으로 그 존재를 선포한 날이었다.

 1919년 3월 1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를 부정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세계만방에 알리면서 거국적인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후 만세운동은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연해주·미주지역으로까지 번져갔고, 조국독립에 대한 열망은 커져갔다. 독립국으로서 정부를 세우고 싶은 열망과 독립의지를 한 곳으로 모아 조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할 필요성이 대두되어 국내외 여러 곳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여러 개의 임시정부는 곧 대한민국임시정부로 통합되어 이후 꾸준하게 국권회복을 위한 활동을 벌여 조선의 독립을 이끌어 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고,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하여 해마다 4월 13일을 기념하고 있다.

 임시정부에는 이동녕, 이승만, 김구, 안창호, 김규식, 이시영 등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분들 외에도 많은 분들이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인근 양산지역에서 출생하신 윤현진 선생도 조국독립을 위해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신 분이다. 선생은 1892년 9월 16일 양산 상북 소토리에서 만석꾼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일본 동경 명치대학교에서 법률공부를 하였다. 그는 재학 중 조선유학생학우회를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하였고, 졸업 후 귀국하여 1909년에는 백산 안희제 등과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활동하는 한편, 양산에 의춘학원을 설립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동참한 뒤, 압록강을 건너 단신으로 상해로 망명하였고, 그곳에 모인 독립지사 수십 명과 교류하던 중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는 임시정부 초대 재무차장, 상임위원회 재무위원장, 임시의정원 내무위원, 구급의연금모집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백산상회 자금 30만원을 임시정부 군자금으로 헌납하는 등 자금문제 해결을 위해 몸소 모범을 보였다.

 이 같은 헌신적인 노력이 민족교육 실시를 위한 교육기관 설립, 독립군 양성, 외교활동 등으로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당시 임시정부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 지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가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을 때, 일본의 조일신문에서 그의 사망을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 논평한 것을 보면 임시정부에서 차지한 그의 위상을 짐작할 만 하다.

 윤 선생은 1892년 9월 16일 양산 상북 소토리에서 만석군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1919년 4월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고, 이어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정의 재정문제를 해결하는데 최대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1920년에는 독립신문사를 주식회사로 확장하고 안창호와 같이 주금(株金)모집의 발기인이 되어 홍보활동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1921년 5월에는 국민대표회의기성회를 조직하여 활동했으며, 같은 해 중한국민호조사를 결성, 중국과 같이 공동의 적인 일본을 섬멸할 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구국의 일념에서 건강을 돌보지 않고 구국투쟁에 헌신하던 그는 상해에서 30세로 요절하였다. 일제의 신문인 조일신문에서도 "형극의 배일 수완가 윤현진의 사(死)”라는 제목 하에 그의 사망은 임시정부의 패망이라고까지 논평할 만큼 그의 위치는 뚜렷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윤현진 선생처럼 조국을 위해 한평생을 바쳤지만, 후세대의 기억 속에 자리잡지 못한 애국지사들이 많을 것이다. 그분들이 누군가에게 기억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겠지만, 임시정부수립기념일을 전후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이곳 가까이에도 기억할 만한 애국지사가 있었음을 알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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