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恨)의 소리에 홀려 반평생을 소리와 함께 한 국악인 오양순씨(여·52).

 오씨가 울산을 찾아 정착한 지 25년이나 흘렀다.

 악극단과 함께 울산을 찾았을 때 자신의 소리에 환호를 보내준 곳이 울산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씨는 정말 울산사람들이 자신의 소리를 좋아하는 것 같아 소리를 가르쳐주고 함께 하고 싶었다.

 1년여 동안 울산에서의 생활에서 오씨는 울산사람들이 소리를 좋아는 했으나 직접 하는 것에는 상당히 어려워하는 것 같아 경남 충무로 내려갔다. 그러나 마음은 항상 울산에 있었다.

 충무에서의 4년여 생활을 접고 자신의 소리를 좋아했던 울산사람 곁으로 다시 왔다. 그게 벌써 25년을 훌쩍 넘겨버렸다.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둘째는 어느새 매니저로 일본공연을 돕고 있고, 무용을 하는 며느리는 자신과 함께 무대에 오르고 있다.

 한이 서린 소리에 끌려 아직 그 흔한 자가용 한대 없이 지내고 있다.

 공연이라고 갈라치면 버스 안 사람들이 한복에 쪽지진 머리를 한 자신의 모습을 힐끔보는 것도 마음에 두지 않는다.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아직도 자신의 공부가 미덥지 못해 돈이 모이면 공부를 더 하고 싶단다.

 몇해 전에는 서울예술대의 교수로 있는 진도북춤의 인간무형문화재인 박병천 선생을 찾아가 진도북춤도 배웠다.

 또 설장구를 배우기 위해 성균관대 명예교수로 있는 이영상씨를 찾아 설장구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스승들로부터 "그년 참 걸물이네"라는 최고의 칭찬도 받았고 지난해 월드컵 때는 자신의 소리를 외국손님과 시민들에게 공연으로 보여주기도 했다.

 "소리에는 한이 서려있어 한의 세월을 살아온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오씨는 얼마전 남구 야음동 야음2동사무소 옆에 국악민속 찻집을 열었다.

 한의 소리에 홀린 오씨가 그 한의 소리를 내는 것들을 하나하나 모아 작은 박물관을 만든 셈이다.

 오씨는 그 한의 소리를 내는 것들이라면 품에 안았다.

 처음에는 자신을 감추고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도와주는 탈을 모았지만 전통 국악기를 볼 때마다 사진을 찍어 박상태 선생에게 재현해 달라고 했다.

 종묘제례악에 사용되는 편종과 편경을 비롯해 풍물패들이 사용하는 것들까지 오래되고 전통의 것이라면 모았다. 10여년 동안 악기를 모으는 데 돈이 얼마나 들어갔는 지도 모른다.

 이는 "한의 소리와 한의 소리를 내는 타악기 등을 갖고 가슴에 한을 담은 사람들과 차 한잔을 나누고 싶다"는 오씨의 소망 때문이다.

 전남 여천 율촌면이 고향인 오씨는 6세 때부터 소리를 했다.

 오씨의 소리는 아마 어머니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시작됐는 지도 모른다. 오씨의 기억에 어머니의 소리는 동네에서도 알아준 것으로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오씨의 끼는 직업군인이었던 아버지보다 아마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는 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끼는 또 여동생 양심씨를 서편제 시인으로, 남동생 인섭씨를 화가로 성장시켰다.

 오씨는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언니 오빠들은 가르치는 조교로, 때로는 선생님을 대신해 직접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과 같은 고생을 물려주기 싫어 큰 딸인 양순씨가 소리를 하는 것을 내심 못마땅해 했다.

 어깨너머로 소리를 배우던 10대 후반의 오씨는 어머니의 손목시계를 훔쳐 소리와 판소리 등을 전문적으로 교육하는 부산의 국제고등기술학교를 찾았다.

 오씨는 어려웠던 어린 시절이 한의 깊이를 더욱 깊게했고, 넓이를 더 넓게 만들었다.

 오씨는 울산에서도 서울의 대학로와 같이 자연스럽게 공연을 할 수 있는 무대에서 시민들이 마음껏 볼거리를 즐길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오씨는 "문을 연지 벌써 1년이 돼 주말이면 수만명이 찾는 울산대공원에 작은 무대라도 마련된다면 무료공연에 기꺼이 나서 공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전통의 소리를 들려줄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오씨는 "공업과 산업이 주는 나쁜 이미지를 씻기에는 전통문화 만큼 훌륭한 소재가 없다"고 말했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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