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해전의 겨울이었다. 매서운 추운 날씨 탓에 다소 행동이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몇 겹의 옷을 껴 입고 아침 일찍 버스를 탔는데 출근시간인지라 버스는 만원이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차에 몸을 맡기다시피하고 짐짝 신세가 된 채 두 다리에 힘을 바짝 주고 서 있자니 이마에서는 땅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도 버스 속의 모두는 목적지까지 가야한다는 생각에 인내심을 가지고 참고 견디는데 그때 누군가가 옆 사람을 밀치며 "무슨 사람들이 이리도 많아"하고 짜증을 내면서 투덜 투덜 인상을 쓰는게 아닌가. 옆사람의 숨소리만 들리던 그 공간의 정적은 일순간 깨지며 아울러 모두가 이리 저리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복잡한 가운데서 유지되던 질서도 깨졌다.

 순간 나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고민했다. 계속 낮은 목소리의 불평은 이어졌고, 어른들의 점잖지 못한 언행 때문에 어른들 속에 푹파묻혀 있는 한 어린 학생에게 내심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매순간 우리는 다른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더불어 공동체의 삶을 살아가야한다. 자신과 또다른 조건의 사람들과 함께 살다보면 내 본래의 생각과 의도와는 무관하게 여러 문제들이 발생하고 화가 생겨나게 된다. 그것은 언제나 다름아닌 "너"와 "나"라는 입장에서 기본을 아예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며 오직 자기만을 집착하게 되는 어리석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더불어 함께 살아가면서도 "너"와 "나"로 나뉜 채 살아가는 우리는 서로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는데 성(性)이 다른 사람이 살아가는데는 필수적인 조건이 화합(和合)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기 때문에 먹을 것이 있으면 자기 혼자만 먹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지옥의 숟가락은 너무나 길어 자기 것으로는 제 입으로 도저히 떠 넣어 먹을 수가 없다. 언제나 상대방을 불신하고 시기하기에 지옥에 있는 사람들은 눈 앞에 먹을 것을 두고도 서로가 굶주리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극락에 있는 사람들은 내 이웃을 먼저 생각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당연하게도 먹을 때는 언제나 서로 서로를 위하고 화합하면서 배부르게 산다고 한다. 긴 숟가락인데도 말이다. 이것은 지옥과 극락의 비유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삶을 돌이켜 보면 귀중한 교훈이 된다.

 여기서 자신만을 위해 탐욕스럽게 사는 사람과 이웃과 더불어 생각하는 사람의 차이는 아주 대조적이다. 결국 너와 내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라는 하나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가질 때 사람들과의 관계는 한층 가깝고 평화로운 사이로 발전하게 되고 괴로움의 세계가 자유와 평안의 세계로 바뀌게 된다. 대립과 갈등 고통으로 얼룩진 세계를 바꿔나가는 원동력은 이 사회의 구성원인 "너"와 "나"가 "우리"로 다시 연대될 때에 생겨나는 그 따뜻한 에너지인 것이다.

 출근 시간의 버스가 복잡한 까닭은 많은 사람이 버스를 탄 탓이고 그리 사람이 많음은 그중에 분명 내가 있었던 까닭이니라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