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암리(新岩里)는 옛날 외남면 지역으로 정조 때는 군령리라 했다. 1914년 군령·운곡·신리 외에 효열동의 일부를 합해 신리와 운암의 앞 뒤 글자를 따서 신암이라 하고 서생면에 편입되었다.

 신암리에는 효암강(孝岩江 효암천)이라는 작은 강이 흐르는데 서생역의 남쪽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이 강 어귀에 남북으로 긴 마을을 얼마 전까지 효열리라 불렀다. 서생면사무소가 있는 이 아담한 마을을 효열이라 부르게 된 데에는 사무치는 사연이 있다.

 바닷가 마을의 이곳 사람들은 대대로 고기잡이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이 마을에 남편은 바람에 배를 맡겨 동해바다 멀리 나가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석양 무렵이면 돛대에 바람을 싣고 돌아오고, 부인은 이 바위 저 바위를 돌아다니며 해초를 뜯으면서 생계를 꾸려가는 단란한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평상시와 다름없이 고기잡이를 나갔던 남편이 해가 저물어도 돌아오지 않는 것이었다. 아내는 몇날 며칠을 수평선을 바라보며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 간절한 마음은 끝내 물거품이 되었다. 남편이 바다에서 돌풍을 만나 배가 뒤집혀 동해의 수중고혼이 된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깨어진 배 조각이 뭍으로 밀려 온 것을 마을사람들이 보았고 부인이 달려가 그 배 조각을 부둥켜안고 통곡하며 몸부림치다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부인은 남편을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고, 이윽고 부인은 "내 남편은 필경 물고기 밥이 되었으리라. 그런데 내 어찌 남편의 살을 뜯어 먹고 피를 빨아 먹었던 생선을 입엔들 댈 수 있으랴"하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마침내 부인과 자식들은 생선은 물론 바다에서 나는 어떤 것도 일체 먹지 않게 되었다. 이 일은 온 마을에 알려졌고 고을 원님까지 알게 됐다. 그 후 사람들은 그 절개를 우러러 보아 마을 이름을 "효열"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올해 들어와 남편에게 폭행을 당했다며 경찰에 신고해 온 가정폭력 사건이 지난해에 비해 크게 늘었다. 남편이 흉기를 들고 과격한 폭행을 일삼다 구속영장이 신청되는 경우도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결혼 당시는 선망의 대상이었던 연예인들 조차 뜻하지 않은 폭력사건으로 가족해체의 위기를 맞고 있다. 가정에서의 폭력은 그동안 속내를 드러내놓고 밖으로 떠들지 않는 것이 전통적 미덕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동안 남편의 폭력을 참아오던 아내들이 폭력에 대항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을 볼 수 있다. 미성숙 된 사람이 감성에 따라 행사하는 폭력을 법의 힘에 의지해 막아보려는 가녀린 몸부림이다.

 효열마을의 죽은 남편이 생전에 어떠했기에, 바다에서 죽은 남편 때문에 아내가 바닷가에 살면서도 생선은 물론 바다에서 나오는 그 어떤 것도 입에 대지 않았을까. 남편의 지극한 사랑을 받은 아내가 아니라면 도무지 불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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