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주는 나라 전체가 온통 보성초등학교 교장 자살사건에 대한 시비를 가리는 일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던 기간이 아닌가 싶다. 자판기를 이용하면 불과 이삼백원 남짓으로 얼마든지 구할 수 있고, 어찌보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대중음료 하나에 한 사람은 생명을 잃었고, 다른 한사람은 평생을 봉직하고자 하였던 직장을 포기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차 한잔에 그간 좋지 않은 관행이 묻어 있었을 수도 있고, 지나친 저항심이 같이 얽혀 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사회 반목의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급속한 산업발전이 그 원인이 되었겠지만, 우리의 경우 반드시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봉건관료사회를 벗어나자 바로 식민통치를 겪었고, 해방되자 독재와 군정으로 고통을 받았던 백성들이다. 단 한번도 믿음직한 위정자를 가져 본 적이 없으니 스스로 방어기제를 최대한 발동하여 의심의 태도를 놓지 않았고, 항상 저항하는 태도를 견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러한 시간들을 겪어 오면서 우리 스스로 속칭 ‘반골’ 기질을 갖게 되고, 서로간에 쉽사리 마음을 열지 못하고 의심하면서 반목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차 시중’이라고 하면 우선 화부터 치밀어 오를 수 있다. ‘차’라는 단어야 일응 가치중립적이다 할 수 있을는지 몰라도 ‘시중’이라는 말속에는 당연히 종속과 강요의 의미가 내포되어 있으니 당연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번 더 돌이켜 실제 우리 주위에서 소위 일어나는 차시중의 행태가 이런 극단적인 형태로 일어나는 것인지 의문이 들 때가 많다. 선배변호사들과 야근때 야식 후에 의당 차를 준비해야 했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과연 그 속에 종속과 강요가 있었는가’ 생각해보면 실소만 날 뿐이다. ‘아무개 차한잔 가져와’라고 하였다면 사정이 다르겠지만, 대개는 특별히 누구를 지칭하지 않고 ‘차 한잔 할까요’라고 하거나, ‘아무개씨 우리 차한잔 하는거 어때요’라고 말하게 된다. 그럼 별 거부감 없이 차를 타서 같이 마시게 되고 그 가운데 선배로부터 이런 저런 경험이나 요령을 듣고 배우게 된다. 차 한잔이 오히려 서로에 대해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덧붙여 한가지 더 지적하고 싶은 것은 전교조의 조급함이다. 물론 전교조 충남지부의 주장대로 차시중이 강요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전혀 배제된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반면 그 반대의 가능성도 여전히 열려 있다. 그렇다면 그 반대의 가능성에 대하여서도 조금 더 신중하게 접근을 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자기 구성원의 말만을 일방적으로 취신하여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상대를 압박하는 태도는 최소한 참교육을 기치로 하는 단체가 취할 행동은 아니라고 볼 것이다. 적법 절차의 기본원리중의 하나가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변명의 기회를 가지지 않고는 비판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일방의 말만 믿고 단정짓고 변명도 듣지 않고 사죄를 강요하면서 비난하는 것은 결국 정당한 절차를 통한 해결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느끼는 소신과 정의에 배치되는 행동이면 모두 비난받아 마땅하다는 독선으로 비쳐질 수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대체로 사람의 죽음앞에서는 숙연해지고 관대해지는 법이다. 비록 자신에게 전혀 과오가 없더라도 유감표명을 하는 것이 사람의 정이다. 하지만 지금껏 단 한차례도 전교조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유감표명을 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가 없다. 평생을 교직에서 봉사하고 자신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마지막까지 몸부림쳤을 망자를 생각한다면, 최소한 앞으로는 좀더 객관적이고 신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태도표명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헌데 오히려 지금 나서서 ‘교장선출제’를 거론하고 있으니 ‘참으로 너무 야박하지 않는가’라는 생각까지 듣다. 최소한 우리들 가슴에 망자에 대한 기억만이라도 묻고 나서 다그쳐도 그리 늦지는 않을 것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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