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시 울주군 삼남면 상방마을에 취재하러 갔을 때의 일이다. 분명 91년에 취재했던 마을인데 전혀 다른 마을이었다. 산아래로 넓은 터가 경계선만 지워진채 남아있고 풀만 무성한 땅이 허허로웠다. 드문드문 새집에 들어서고 있고 어린이들의 관심도 끌지 못한 채 벌써 녹이 쓸어가는 놀이터만 어디선가 본 듯 기시감(데자뷰)으로 인한 정겨움이 느껴졌다. 이장과 만나기로 하고 빈터 한편에 서서 바람을 마시고 있었다.

 의외로 40대 초반의 젊은 이장이 트럭을 타고 나타났고 그는 10년전 경상일보를 들고 나왔다. 그것도 깨끗하게 찢어내 소중하게 보관했던 것이 아니라 북 찢어내 언저리가 비뚤비뚤했고 색깔이 어지럽게 바래 있었다. "태화강 백리"라는 제목의 기사 속에 그 이장의 이름이 있었고 그의 과수원에서 그의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려 있었다. 기사의 마지막에는 내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러나 나도 그도 서로를 전혀 기억해내지 못했다. 10년전에 삼남면에서 가장 젊은 이장이었던 그는 몇사람을 거쳐 다시 이장이 되었고 여전히 가장 젊은 이장이었다.

 기억 속에서도 재현하기 어려울만큼 변해버린 것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 지난 1991년 1월4일부터 83회에 걸쳐 연재했던 "태화강 백리"에서 2002년 1월8일부터 59회에 걸쳐 이어졌던 "신태화강 백리"까지 10여년의 세월은 그런 것이었다. 아주 가끔은 그 변화가 계획된 것이어서 체계적인 경우도 없지 않았으나 그보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필요에 따라 여기저기 새롭게 만들어나가다보니 정돈되지 않은 개발로 인해 마을 모양이 상스러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동네 사람들끼리 인심도 사나워지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10여년만에 가장 많이 변한 동네는 작천정 위에 등억온천 일대 화천마을. 오롯이 농사만 짓던 그 마을은 10여년전에 이미 변화가 예고되어 있기는 했다. 그 때 이미 온천이 개발되면서 땅값이 마구 치솟고 있었다. 목욕탕이 속속 들어서고 좋은 경치를 찾아 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면서 카페와 모텔이 속속 들어섰다. 그렇다고 돈 벌었다는 사람은 없다.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결국 논밭만 잃어버리고 오히려 쪼그라든 밭뙈기에 의지하며 더욱 군색하게 살아가면서 카페와 모텔에다 이유없이 화풀이를 하곤 한다.

 가천리 연봉마을의 한 농부의 말이 생각난다. "공업지역으로 지정되어 땅값이야 많이 올랐죠. 그래도 땅 팔아서 도회지로 나가서 사업이나 장사를 시작한 사람치고 잘 된 사람이 별로 없어요. 오히려 그 보다 더 싼 논 몇만평 사서 여전히 농사 짓고 있는 사람이 옹골차죠." 열심히 소여물을 장만하고 있던 그는 땅 파먹고 살던 사람이 도회지 사람 상대해서 돈 버는 게 마음대로 될 턱이 없다고 장담했다.

 시골이라고 어디에나 카페와 모텔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골목안까지 시멘트 포장이 되었다는 것 외에는 사람살이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마을도 없지 않았다. 경주김씨의 씨족마을인 상북면 명촌리와 천전리는 여전히 담배를 물고 문밖을 나설 수없을 만큼 친인척들이 많이 살고 있다. 올해 여든여덟인 김덕생 할아버지는 요즘도 출타할 때면 두루마기에 유건까지 갖추고 집밖을 나선다.

 그래도 이들 마을은 농사라도 풍족한 탓인지 살림살이가 고되어 보이지는 않았지만 삼동면 사촌리의 왕방마을은 무너져가는 우리의 농촌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했다. 사촌면소재지에 달린 하나의 자연마을인데도 울도 담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집에 노인들만 살고 있었다. 마을 어디에도 젊음이나 새로움이 엿보이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시골마을이 거의 노인층이 중심을 이루지만 왕방마을은 유독 더 그랬다. 이 보다 훨씬 첩첩 산골에 있는 보은리는 아직도 발전기를 돌리는 방앗간이 통통 소리를 내며 방아를 찍을 만큼 시골이었지만 그래도 어디선가 생기가 엿보였다.

 그런가하면 길천리는 옛날 거지화현의 현청이 있었던 마을답게 품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마을도 옛모습을 잃지 않으면서도 깨끗하게 새단장되어 있었고 경로당에 모여 앉아 화투를 즐기는 노인들도 양복을 깔끔하게 차려입고 넥타이까지 매고 있었다. 마을입구도 오래된 나무들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언덕을 만들어 작은 동산으로 꾸며놓는 등 시골다운 정취를 살리면서 살기도, 보기도 좋게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들, 태화강의 지천을 따라 옹기종기 마을을 이루었던 태화강 사람들. 예전에는 고만고만하게 살았던 그들은 이제 마을마다 너무나 달라졌다. 어쩌면 그것은 그들에게 더 이상 태화강이 의미가 없어졌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 강물"을 "한 솥밥"처럼 먹고 살던 시절에는 서로 비슷한 삶을 누렸지만 수돗물이 언제나 콸콸 쏟아지면서 우리의 관심이 태화강을 떠났듯이 삶의 양식도 달라진 것이다. 공장이 들어서거나 위락지로 인기를 얻으면 땅값이 오르고, 그로인해 마을도, 사람들도 한순간에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강을 좇아 마을을 찾아갔지만 마을은 강과는 아무 상관이 없어졌다. 마을은 여전히 강을 따라 형성되어 있었지만 강을 의지하고 살지는 않았다. 노인들의 기억 속에서만 태화강은 여전히 싱싱하게 살아 있을 뿐이다. "집 앞 개울물을 바로 떠다 먹었지, 그 때는 물이 얼마나 좋았다구". 정명숙기자 jms@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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