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의 여독이 미처 풀리지 않았던 지난 24일 오전 11시40분.

울산시 동구 방어동 주민센터에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한 할머니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출입문 앞에서 잠시 주춤거리던 할머니는 “동장님을 좀 뵈러왔다”고 말을 꺼냈다. 이윽고 박용준 동장과 마주앉은 할머니는 흰색 봉투를 성큼 내밀었다.

“너무 적은 금액이라 좀 그런데… 한 번 세어보세요.”

두껍다면 두껍고, 얇다면 얇은 봉투는 어림잡아 몇 만원 정도가 될 것 같았다. 할머니는 “수재의연금으로 내고 싶다”며 “오는 길에 은행에 들러 돈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놀랍게도 봉투 안에는 아직도 할머니의 온기가 가시지 않은 빳빳한 10만원권 수표 10장이 들어있었다.

울산 동구에 사는 익명의 한 할머니가 추석연휴 중부지방을 강타한 폭우로 물난리를 겪은 수재민들에게 써달라며 성금 100만원을 기탁했다.

방어동 주민센터에 따르면 올해로 82세인 이 할머니는 추석 당일 TV를 통해 중부지방의 수해 현장을 보고 성금 기탁을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할머니는 박용준 동장을 만난 자리에서 “추석 당일에 수재민들의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됐다”며 “추석차례도 지내지 못하고 설거지를 하다 우는 모습을 보고 가슴이 너무 아팠다”고 말했다.

과거 방어읍사무소 시절 공무원을 지내기도 했다고 밝힌 이 할머니는 끝까지 본인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다. 박용준 동장은 “20여분에 걸친 설득에도 ‘유 대원행’이라는 법명의 월봉사 신도라는 것과 나이를 제외하고는 한사코 입을 열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성금이 너무 적어 민망하니 동장님이 구청에 전해달라”고 부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난데없는 거금을 받은 방어동 주민센터는 구청과 협의, 전국 재해구호협회에 성금을 기탁했다. 관계 공무원들은 “수해와 전혀 관계가 없는 주민이 주민센터에 거액의 성금을 내는 것은 처음일 것”이라며 입을 모으고 있다.

박 동장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라 처음에는 어떻게 해야하나 고심도 많이 했다”며 “별도의 수입도 없으실텐데 선뜻 어려운 이들을 위해 손을 내미신 할머니를 보고 다들 고개를 숙였다”고 말했다. 김성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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