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동은 영조 5년(1729)에 어물동리라 하였다가 순조 10년(1810)에 어물리, 고종 4년(1867)에는 금천리와 고암리로 갈라진 뒤 고종 31년(1894)에 어물동으로 다시 합쳐 단일마을이 됐다. 본래 강동면 지역으로 어물이라 하였는데, "어물’은 마을 서편의 산세가 완만하게 늘어져 있는 모양을 형용한데서 온 이름이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구남동 일부 지역과 구암동을 병합해 어물리라 했다. 어물리에는 금천, 황토천, 구암의 세 행정마을이 있었다. 1997년 울산시에 편입돼 어물동이 됐다.
이곳 어물동 황토전부락의 가운데 고개 동남에 있는 물 맑은 물청청(물청진 물칭칭 수청진)골짜기에 들어서다 보면 해송백이라는 산기슭에 "고래 논’이라는 물 좋은 논이 있다. 서마지기 정도 되는 이 논은 크지는 않지만 아무리 가물어도 물 걱정이 없는 일등호답(一等好畓)으로 알려져 있다.
"고래 논’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주전동 해안에 살고 있던 한 어부가 자기의 천부적 생업인 고기잡이를 위해 조그마한 고깃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 한창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는데 갑자기 사나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큰 고래 한 마리가 물기둥을 내뿜으며 다가왔다. 당황한 어부는 급히 어구를 거두고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어 도망쳤다. 그러나 고래는 포기하지 않고 뒤를 "아왔고 마침내 큰 입을 벌려 어부와 고깃배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어부는 그만 아득해지며 실신하고 말았다. 숨이 답답해 깨어난 어부는 살기 위해 기를 쓰고 발버둥을 쳤다. 일단 고래 배속에서 벗어나야 겠기에 뱃장의 칼을 더듬어 잡고서는 고래 뱃가죽을 마구 찢어나갔다.
마침내 어부는 고래 배속에서 탈출했지만 기진해 해안가에 쓰러졌고, 이웃사람들에게 발견돼 정신을 차린 후 고래와 싸운 엄청난 이야기를 했다. 마을사람들은 어부와 함께 그 고래를 찾아 나섰고 죽어있는 고래를 찾아내자 환호성을 질렀다. 고래의 몸을 밧줄로 묶어 한나절이나 걸려 육지로 끌고 왔다. 온 동네 사람들이 힘을 합쳐 뭍으로 끌어올려보니 초가삼간 다섯 채 만큼이나 큰 고래였다. 그는 이 고래를 팔아 논을 샀고 이후로 그 논을 "고래 논"이라 불렀다.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기어이 일을 해내고 마는 울산인의 기질을 엿볼 수 있다. 고래는 울산사람들과 친밀한 동물이다. 사연호의 반구대 암각화에서는 선사시대 이야기의 주인공이었고, 울산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된 고래잡이 기지이기도 하다. 고래 논의 임자가 바다 한 복판에서 맞닥뜨린 고래는 아마 엄청난 크기의 귀신고래였든지 아니면 호기심이 많아 사람이 탄 작은 배 가까이 접근하는 혹등고래였는지도 모른다.
고래잡이(포경 捕鯨)는 생사를 건 전투이고 용맹스런 사람들의 무대이다. 혹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는 "고래 논" 임자의 무용담을 표절한 것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