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시와 뉴욕타임스 소식, UN본부와 초고층빌딩이 즐비한 뉴욕의 모습이 자주 보도됨을 본다. 울산의 남구보다 좁은 뉴욕(맨해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날 세계의 수도로 불리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는 것도 필자의 큰 관심사였다. 물론 대서양연안의 항구도시로서 인근 여러 도시의 중심이고, 미국이란 초강대국의 경제중심인 때문이기도 하지만 필자는 도시계획과 기반시설 건설의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보았다.

 강으로 둘러싸인 맨해튼섬 남쪽의 월가 아래에서 시작된 인구 10만명의 소도시였던 1811년에 이미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오늘날 모양 그대로의 격자형 가로를 둔 도시계획을 했다. 1857년에는 일찌감치 녹지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도심 한 가운데 넓은 중앙공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뉴욕과 5대호를 연결하는 운하가 개통되고 대서양횡단 증기선이 운항되면서 뉴욕은 미국경제의 원동력이 되면서 크게 발전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맨해튼으로 모여들면서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층 임대아파트가 등장하였다. 역마차가 달리던 도로는 교통난이 생기자 도로 위에 고가궤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좁은 맨해튼으로는 도시발전에 한계를 느끼자 1883년에 롱아일랜드를 연결하는 브루클린 다리에 이어 대륙으로 연결되는 워싱턴교도 놓이게 되었다.

 뉴욕(맨해튼) 인구 100만명에 즈음한 105년 전인 1898년에 뉴욕은 시의 경계를 인근의 4개 군(카운티)까지 넓혀 맨해튼, 퀸스, 브루클린, 브롱스와 스테이튼아일랜드 5개의 큰 구(보로)를 둔 오늘날의 대뉴욕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확대된 뉴욕시는 평지로서 면적은 지금의 울산시 면적의 4분의 3이며, 인구는 약 160만명이었다.

 현재 뉴욕시 상주인구는 약 800만명으로 대뉴욕 탄생 후 100년동안 맨해튼은 많은 유동인구가 있지만 인구증가는 50만명에 불과하였다. 나머지 지역은 10배인 600만명이 증ㅂ가했는데 브루클린은 230만명, 퀸스는 200만명으로 맨해튼 인구를 넘게 되었다.

 뉴욕의 경계가 맨해튼에서 5개 보로로 확장되면서 지역을 연결하는 여러 큰 교량과 터널이 건설되고, 또 1904년에는 고가궤도 대신에 지하철이 건설되면서 계속 확장되기 시작했다. 대공황이 한창인 때에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세워지는 등 고층건물도 많이 세워졌고, 대규모 상·하수도 시설도 이때 완성되었다. 자동차가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이 지역을 연결하는 도시고속도로가 건설되어 도시의 동맥 역할을 하게됐고, 버스와 지하철이 연계된 대중교통시스템도 갖추게 되었다.

 새로 확장된 곳에는 라가다이공항과 JFK공항이 건설되었고 공원, 운동장, 공원묘원도 들어섰다. 그러나 건설한지 60년에서 120년이나 되는 이 초기에 건설한 교량, 도로, 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은 그 노후화로 뉴욕의 새로운 고민거리로 대두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초기의 도시계획과 도시확장에 따른 교통로의 정비가 있었기에 오늘날 시의 예산을 문화나 복지 등 삶의 질을 높이는데 많이 투자할 수 있게 되었다. 뉴요커들은 이제 "정치수도" 워싱턴과 달리 뉴욕이 세계적인 "경제수도"에서 더 나아가 아름답고 인간적인 "문화수도"의 시대로 불리고 싶어한다.

 해방 후 인구 100만명이 못되었던 서울이 뉴욕의 4분의 3 면적인데 현재 인구가 1천만명을 넘어 포화상태에 있다. 뉴욕시 면적과 비슷한 부산이 한국전쟁이 끝난 2년 후 인구 100만명을 넘어서 35년 뒤에는 390만명 까지 되었으나 지세와 산업구조 등의 이유로 오히려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 울산은 울산시와 울주군으로 분리했다가 1995년 다시 통합하고 2년 후 인구 100만명에 달해 광역시로 새출발하였다.

 울산은 이제까지의 좁은 안목의 도시개발 방식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시각으로 인구 100만명 이후 시대를 대비해야 할 것이다. 뉴욕 등 도시인구 100만명이 된 전후를 살펴보면서 울산도 보다 살기 좋은 적정한 수의 인구와 잠재력에 적합한 산업구조와 한 차원 높은 도시구조의 재정비가 무엇보다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김성득-울산대 교수·뉴욕포리테크닉대 방문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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