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예사롭지 않은 고장이다.

 익산의 왕궁면과 금마면 일대는 옛 금마지역으로 마한과 백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왕궁리 또한 옛 궁성이 있었다는 곳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이 곳이 궁성이었음을 추정하는 유물들이 발견돼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대관사, 관궁사 같은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이 출토 된 걸 보면 궁궐터가 틀림없는 것 같다.

 금마 지역은 특별한 곳이다. 이 지역을 중심으로 백제의 불교 문화가 꽃을 피웠고 지금도 옛 가람, 석불, 석탑 등이 곳곳에 남아 있다.

 예사롭지 않은 그 땅에 오랫동안 사모해 온 그가 있다. 꿈 속에서도 그리워했고 보고싶었다. 고고한 자태를 지니고 있는 그는 강건함에다 적당한 부드러움까지 겸비한 신사다.

 어느 해 였던가? 수십 그루의 배롱나무에서 일제히 꽃을 피운 날 처음 만났었다. 배롱나무가 병렬하듯 서 있던 길을 따라가 마주하는 순간 완벽한 그의 모습에 눈이 멀어 버렸다. 백일홍보다 더 진한 빛깔로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진종일 먹는 것도 잊고 그만 쳐다보았다. 키가 큰 그가 만들어 내는 그늘에 오래 앉아 있어 보았다. 백일홍 꽃 그늘에 앉아 숨을 죽이고 목 아프게 올려다 보기도 했었다. 하루를 그와의 열애에 빠진 후 그리움을 풀지 못해 가슴앓이를 했다. 익산까지 가는 일이 있어도 지나치기만 했지 선뜻 다가가지 않았다.

 봄이 한창이다. 봄기운은 내 안에서 스멀스멀 그에 대한 열정을 피워 올렸다. 무르익은 봄기운에 떠밀려 먼 길을 달려갔다.

 사모하는 마음이 깊어 병이 될까봐 몇 년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옛 고을 금마저로 향했다. 백제 무왕의 전성기, 익산에 미륵사가 세워지고 금마저는 백제 문화의 찬란한 꽃을 피웠었다. 그 땅을 향해 가는데 봄은 한창이다.

 왕궁평은 낮은 구릉지대다. 그 위, 툭 트인 넓은 터에 바람과 햇살에 온 몸을 맡기고 강건한 모습으로 우뚝 서 있다. 땅기운은 무르익어 오층탑 주위는 생기가 넘친다. 생명이 꿈틀대는 소리가 들린다.

 왕궁평 낮은 언덕에 벚꽃은 꽃구름을 이루며 피어있다. 키가 큰 그가 얼굴을 내밀고 어서 오라 손짓을 한다.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향해 가는 데 발 밑에 민들레가 지천으로 피어 방긋방긋 웃는다. 다가갈수록 그의 웅장함이 돋보인다. 그는 한 송이 꽃이다.

 그가 아름다운 것은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지닌 품위를 고스란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드러나지 않게 당당하다.

 8.5m의 그는 훤칠하다. 고고함이다. 또한 믿음직스러움으로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굳건함만이 아니다. 멀리서 보면 날아갈 듯 경쾌하다. 강건함과 경쾌함이 조화를 이루어 왕궁평은 부처의 터가 되었다.

 첫 인상은 정림사지 오층석탑과 빼어 닮아 백제 탑임을 의심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 탑의 조성시기를 두고 백제계, 통일신라, 고려초기 등 엇갈린 설이 나왔다.

 1965년 해체 복원 때, 기단의 구성양식이나 탑 속에서 나온 고려시대 양식의 사리장치가 발견되어 고려 전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측하고 있다.

 우리에겐 그런 것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익산 땅에는 아직도 아사달의 후예가 살고 있어 여기 저기 석물 공장이 즐비하다. 그 땅에 세워진 탑이니 그 탑을 조성한 석공의 불심을, 예술혼을 읽을 수 있고 가슴으로 느끼면 그만이다.

 왕궁리 오층탑의 낮은 단층 기단은 1층의 지붕 돌보다 좁다. 그것은 통일신라탑과 확실하게 다른 점이다. 몸돌은 우주를 돋을 새김한 기둥모양의 돌로 네 모서리를 세우고 탱주를 새긴 네 장의 중간 면석을 짜 맞춰 만든 기법이 수려하다. 돌을 다루는 백제인 들의 솜씨를 엿볼 수 있다. 지붕 돌의 층급 받침은 모두 3단이다. 이 탑의 매력은 얇고 넓은 지붕 돌이다. 지붕 돌의 완만한 경사와 약간 들린 네 귀가 기품이 있다. 경쾌한 상승감을 더해 준다.

 옛 백제의 땅, 그 왕궁 터에 홀로 남아 화려했던 시절의 영화를 전해주는 그가 있어 왕궁리는 역사의 고장이다.

 이곳에 문화재 발굴이 진행중이다. 유물 기념관도 한창 공사중이다. 그래서 호젓하던 옛 맛이 없다. 그를 만나러 오는 설레는 마음이 퇴색된 느낌이다.

 보물이었던 왕궁리오층탑은 학술적 가치가 중요함을 인정받아 1997년 국보 제 289호로 재 지정됐다.

 그의 몸에 손을 가만히 대어본다. 그의 속내가 전해진다. 나는 말없음표를 여러 번 찍고 돌아선다. 이제 그를 자주 만나도 될 것 같다. 사모하는 마음은 그를 향해 가는 힘이니까.

 백일홍이 아롱아롱 피는 날, 돌바라기 회원들과 함께 와야겠다. 모두 그의 매력에 빠져 이 왕궁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주변볼거리

미륵사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 미륵산 남쪽 기슭에 위치한 백제 무왕때 창건 된 절이다. 미륵사 터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큰 절터이며 금당지와 회랑 승방 등의 자취들이 석물과 함께 남아있다.

 국보 제11호인 미륵사지 서탑은 목탑을 충실히 모방한 한국 석탑의 시원양식으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된 것이다. 이 탑은 현재 해체 복원 공사가 진행중이다. 보물 제236호인 당간지주 한 쌍이 우아한 자태로 남아 있다. 97년에 만들어진 미륵사지 유물 전시관에는 400여 점의 유물과 자료가 전시돼 미륵사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나와 삼례 쪽으로 조금만 가면 보물 제 46호인 동고도리 석불입상을 볼 수 있다. 오른쪽 논 가운데 두 기의 석 불이 우뚝 서 있다.

개천을 사이에 두고 200m 정도 거리에서 마주보고 서 있는 이 불상은 남녀로 토속적인 수호신의 표정을 나타내고 있으며 고려시대 작품이다.

 불상이라 불리지만 기둥 같은 몸체에 네모난 얼굴, 가는 눈, 짧은 코, 옅은 웃음기, 작은 입술은 그 모습이 매우 소박하면서도 친근해 장승과 같은 인상을 풍긴다.

#찾아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삼례 IC에서 나와 1번 국도를 따라 익산시 금마쪽으로 5.2㎞ 정도가면 오른쪽으로 왕궁리 오층탑으로 들어가는 길이 보인다. 국도에서 보면 얕은 구릉의 능선위로 탑의 윗 부분이 보인다.

 동고도리 석불은 왕궁리 오층탑에 이르기 1㎞ 전 오른쪽 논 가운데 있다.

 미륵사 터는 왕궁리 오층탑에서 나와 1번 국도를 따라 1.7㎞ 가면 금마 사거리가 나온다. 사거리에서 좌회전해 2.6㎞ 가면 미륵사 터가 넓게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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