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암울한 역사공간이었기는 하지만 1980년대 이후 한국사회는 실로 엄청난 변화를 겪어왔다. 우선 물질적인 면에서 유사이래 가장 풍요를 누리고 있고 이로 인하여 8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는 그 생각에서 전 세대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컬러텔레비전을 시작으로 한 영상세대이자 컴퓨터의 대량 보급에 따른 디지털 사고의 주역들이다. 이들의 생각은 단편적이거나 선형적인 것이 아니라 순환적이며 통합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게서 선배나 어른을 무조건적으로 존경하고 따르는 선형적인 사회의식은 이미 낡은 생각이다. 비록 경제적인 이익은 없다고 하여도 취향이나 느낌이 같은 일이라면 어디든 달려가서 일을 벌이는 수천 수만의 군중으로 급변한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이들은 단순한 익명의 군중이 아니다. 이들은 보이지 않는 인터넷이라는 끈으로 묶여진 단단한 유대를 가진 생각하는 공중이다. 이제 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말을 거역 할 수 없게 되었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드러나는 변화의 큰 물결 앞에서는 지금까지 가치와 권위를 유지 해 왔던 진리란 한낱 기존의 이권을 지키려는 보수 수구세력의 공허한 주문(呪文)에 불과한 것이라고 비난받기 쉽상이다. 이렇게 변화와 개혁은 우리 시대의 화두가 되었다.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사명감을 실천한다며 앞서가는 이들에게는 보통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예리한 통찰과 식견이 있는 듯하다. 특히 정치하는 이들에게서는 전능이 있는가 싶다.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순간 벌써 지난 세력은 거의 악의 축(?) 수준이며, 청산의 대상이 된다. 사회는 근본부터 뜯어 고쳐야 하며, 시민의 의식은 철저하게 교육되어 새로 태어나야 할 것으로 치부된다. 심지어 지난 역사 마저 바로 세워야 할 사업 대상이며 나라 마저 재건국되어야 할 대상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이 엄청난 일들은 실패로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채 쓸쓸히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본다. 의욕이 앞서 거창하게 일을 벌였던 정권의 끝이 더욱 씁쓸했다. 필자는 멀리도 아닌 전전 두 정권에서 그 실례를 본다.

 수십년의 군사독재를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란 이름으로 출발한 김영삼정권은 오로지 부패청산, 돈 안 받는 정부를 내세웠건만 부패와 뇌물에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형편이다.

 50년만의 정권교체, 진정한 국민의 정부를 이룩했다는 끝도 보이지 않을 자긍심으로 출범한 김대중의 국민의정부는 어떤가?

 개혁의 상징이다시피 독점적 개혁과 변화를 주창하며 정권의 명운을 걸다시피 한 김대중정부 또한 그 끝은 전과 다르지 않았다고 본다. 물론 아직은 역사의 평가가 남아있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권력독점, 독직부정까지 역사가 좋게 평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햇볕정책을 포함한 일련의 통일을 위한 충정어린 정책도 그 과정에서 정보의 독점, 필요의 정당성만 내세운 밀어 붙이기식 추진의 휴유증이 얼마나 심각한 결과로 나타나고있는지 끝을 가늠할 수가 없다. 하물며 개인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큰 영광이라 아니 할 수 없는 노벨평화상까지 개혁독점에 그 빛이 훼손되고 있으니 두 말 할 필요조차 없다.

 이 모두가 과욕이 빚은 안타까운 결말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 좋은 점은 몇몇의 현자보다는 그만그만한 보통사람들의 지혜가 모여 다수가 만족하는 사회를 만든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영양제와 같이 필요한 것도 있고 사탕과 같이 꼭 필요하지는 않지만 맛있기에 원하는 것도 있다. 개혁이 필요한 것이라고 억지로 먹이려 하지 않으면 좋겠다. 더구나 그 필요마저 개혁주도자들이 독점판단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반 개혁이 될 것이다.

 한 시대에는 분명히 그 시대의 정신이 있다. 그 시대 지배세력의 생각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생각이 된다. 제도적 다수의 생각이 반드시 진정한 다수의 생각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할 수 있으나 다수일 확률은 높다. 절대 현자가 없는 시대, 절대 현자의 존재를 인정하기 어려운 이 시대는 민주적 확률게임을 무시하는 것도 개혁적 처사가 아님을 새겨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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