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4주년을 맞은 경상일보가 창간특집 기획물로 "집성촌(集姓村)을 찾아서"란 새로운 연재물을 시작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집성촌의 과거를 되짚어 보고 오늘의 모습을 투영시켜 내일을 설계해보기 위함이다. 성(姓)이란 테두리로 형성된 집성촌은 부모의 양성을 넘어 무성(無姓) 운동마저 일고 있는 오늘, 잠시나마 과거로의 여행에 독자들과 함께 떠나고자 한다. 집성촌을 통해 점차 사라져 가는 공동체적 사고를 되찾아 보는 것도 후세의 작은 노력이라 여겨진다. 그러나 집성을 이루며 살던 당시와는 달리 삶의 정체성이 급속히 변화된 지금 그 모습을 찾기는 그리 쉽지많은 않을 듯 싶다. 편집자 주

(1)들어가면서

 영도 하씨, 성남 신씨 등 외국인들의 귀화로 새로운 성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지난 85년에 실시된 인구 및 주택센서스에서는 274개 성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지만 대략적으로 현재 우리나라에는 300개 안팎의 성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가운데 김(金), 이(李), 박(朴) 등 3성이 전체의 절반을 넘어 70% 가량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흔히들 서울에서 돌을 던지면 김서방, 이서방, 박서방 중에 한명이 맞는다고들 하는 모양이다.

 62년 울산시 승격 이후 산업화의 요람으로, 산업수도로서, 또 광역시로 41년동안 급성장해버린 울산광역시. 마을단위의 삶에서 대도시의 삶으로 사람들의 사는 모습이 많이 변했다.

 또 굳이 따지자면 농사가 전부였던 시절이 현대화를 거치면서 다양한 직종으로 다분화되면서 자연 마을단위의 삶이 도시로 옮겨갔다. 집안 개념의 가족이 이제는 부부와 자녀만을 중심으로 한 핵가족으로 자리를 옮겼다. 8촌간은 한솥밥을 먹는 관계라는 말은 이제는 새삼스럽다.

 마을 이름이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됨됨이를 말해주던 시절에는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한 곳에 집성을 이루고 살았기 때문이다. 울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도 10여개가 되는 것으로 기록 속에 남아 있다. 또 다른 곳에서 유입된 뒤 울산에서 터를 잡음으로써 집성을 이룬 성씨도 울주군 지역의 읍·면마다 자리를 잡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마을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같은 성의 사람들이 자의반 타의반으로 마을을 떠나버려 이제는 과거에서만 그 흔적으로 찾을 수밖에 없는 곳도 적지 않다.

 임진왜란(1592~98년), 병자호란(1636년), 그리고 민적법 시행(1903년), 창씨개명(1939년), 조선성명복구령(1945년) 등은 성씨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씨족 개념에 가장 큰 변화를 준 요인들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대규모 외침을 당하면서 본관을 중심으로 지근의 거리에 모여살던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남쪽에서 북쪽으로, 또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피난지에 안주, 새로운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전장에서 공을 세워 식읍을 받아 새로운 본관을 가지기도 했다.

 울산을 본관으로 삼고 있는 성씨만도 여러 개가 기록상으로 남아 있다.

 울산 김씨, 울산 오씨, 울산 박씨, 울산 이씨, 학성 이씨 등등.

 울산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둘째 아들이자 마의태자의 동생 김덕지를 시조로, 14세손인 김환을 중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로 조선시대에는 본관인 울산보다 호남에서 4대 명족의 하나로 이름을 날렸다.

 또 중국의 소주를 본관으로 삼고 있는 소주 가씨는 시조 가유약의 묘소를 울주군 서생면에 두고 있기도 하다.

 학성 이씨는 울산을 본관으로 하고 있는 성씨답게 공강파, 농소파, 봉사공파, 월진파, 현령공파 등으로 나뉘어 농소 달천, 웅촌 석천, 남구 신정동 등 울산 곳곳에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학성 이씨 시조 이예가 고려말~조선초 불사이군을 내세워 울산으로 낙향, 일찌감치 터를 잡았다. 또 이휴정, 석천리 이씨고가 등은 부장품 등 우리에게 귀중한 민속자료와 문화유산을 남겼다.

 이와 앞서 울산 이씨는 고려 고종때 현재의 울산인 학성군에 봉해짐에 따라 본관을 울산으로 정해 교위공파, 승훈공파, 첨정공파, 참봉공파, 군수공파 등으로 번창했다.

 이같이 울산을 본관으로 삼은 성씨와 함께 울산에 입향조들이 터를 잡아 집성촌을 형성하며 울산의 곳곳에 뚜렷한 흔적을 남긴 성씨도 헤아릴 수 없이 많다.

 한 때 울주군 삼동면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분포를 보이며 번성한 영산 신씨를 비롯해 단양 우씨, 김해 김씨, 밀양 박씨, 경주 김씨, 광주 노씨, 보성 선씨 등이 삼동지역에 집성촌을 이루며 살기도 했다.

 또 진주 강씨, 경주 김씨, 김녕 김씨, 고령 김씨, 광주 노씨, 울산 박씨, 밀양 박씨, 해주 오씨, 강릉 유씨, 동래 정씨 등도 웅촌을 중심으로 집성촌을 형성하기도 했다.

 이밖에 평해 황씨, 남양 홍씨, 광주 이씨, 광산 김씨, 재령 이씨 등은 서생 등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다.

 경주 김씨는 명촌리와 천전리에, 동래 정씨와 문화 류씨는 상북면 지내리를 중심으로 대표적 집성마을을 형성했다.

 또 두서를 중심으로 경주 최씨, 중구 다전을 대표하는 달성 서씨 등도 집성촌을 이룬 대표적 성씨들이다.

 이밖에 많은 성씨들이 골마다 들마다 집성을 이뤄 제실을 중심으로 공동체 삶을 영위해오고 있다.

 반구대와 천전리 각석의 역사가 말해주듯 울산의 역사적 유래가 깊은 만큼 많은 성씨들이 이 땅에서 살아왔기에 이들이 이룬 집성촌도 성마다 골마다 산재해 이를 일일히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