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을 찾아서-(2)북구 농소 달천, 학성 이씨(鶴城 李氏)

울산시 북구 농소동 달천마을.

 지난해 개통한 중구 서동과 북구 쌍용아파트간 시원스런 강변도로를 따라 북으로 달리다 달천농공단지란 안내 표지판을 따라 왼쪽으로 꺾어 농서초등학교를 지나면 달천농공단지가 나타난다. 농공단지를 지나 조금만 더 길을 따라 가면 바로 옆이 달천마을이다.

 달천마을은 개울가 마을회관 뒤로 산구릉에 맞춰 낮은 집들이 가지런하고도 자유스럽게 흩어져 있다. 부지런한 아낙네들의 손길이 느껴지는 밭들이 집과 집사이에 자리잡아 두엄냄새가 물씬하다.

 회관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도 왠만큼 사람들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여느 시골마을과 별반 다르지 않은 풍경을 달천마을도 갖고 있다. 달천농공단지는 물론 울산 도심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데도 마을 분위기는 완전히 시골이다.

 마을 뒤쪽으로 들어가는 도중 점정 문패 맨 앞자리에 이(李)자로 시작하는 문패가 드문드문 눈에 띈다.

 주민들은 이곳에 거주하는 이씨 성을 가진 주민 대부분이 학성 이씨 농소파의 갈래들이라고 한다.

 학성 이씨 20세손으로 이 곳에 살며 제실을 지키고 있는 이채형씨는 "지금은 달천마을에 학성 이가가 한 20가구쯤 살고 있다"고 말했다.

 이씨는 구한 말이던 1900년대 전후에는 100가구 정도의 마을 가운데 학성 이씨가 60가구에 이를 정도로 집성(集姓)을 이루고 산 곳이 이 곳 달천마을이라고 설명했다.

 번성할 때 60가구 정도의 규모를 이룬 이 곳에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그나마 20여가구가 남아있는 것도 도심에서 그리 멀리 떨어져 있는 않은 지리적 이점 때문인 듯 싶다.

 학성 이씨 농소파들이 살며 집성을 이루기 시작한 뿌리는 학성 이씨 시조인 예(藝)의 5세손인 곤(")으로 알려져 있다.

 이채형씨는 "곤 할아버지가 달천에 자리를 잡은 것을 계기로 이 곳 달천을 중심으로 후손들이 뿌리를 내렸으며 인근 가대, 그리고 멀리로는 발리 등에 까지 집성을 이뤘다"고 전했다.

 지금도 가대와 발리에는 곤 할아버지가 중심인 학성 이씨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송재제와 경사제 등 제실을 마련해 두고 있다.

 학성 이씨 시조의 5세손인 곤이 달천마을 학성 이씨들의 입향조(入鄕祖)가 되는 셈이다.

 입향조 곤이 삼포왜란에서 공을 세운 점을 미뤄 학성 이씨가 이 곳 달천마을에 처음 자리한 것이 약 1천500년 전후로 지금으로부터 50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 학성 이씨의 집성촌 답게 이 곳 학성 이씨들은 마을의 가장 안쪽에 제실인 달천제에 곤 할아버지를 모시고 또 달천제 뒤 설단을 세워 입향조를 기리고 있다.

 이 곳은 학성 이씨들도 입향조가 왜 이 곳에 터를 잡게 됐는 지는 세월이 너무도 오래돼 정확히 설명하지는 못했다.

 이채형씨는 "매년 음력 3월10일에는 울산에 있는 후손들은 물론 멀리 떠나 있던 후손들까지 참석해 향제를 지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 뒤 임진왜란(1592~98년) 당시에는 입향조의 증손인 인상(仁常)이 크게 활약, 선무원종 3등공신에 봉해지면서 정5품인 정랑(正郞)벼슬을 받기도 했다.

 또 입향조의 7세손인 준민도 성균관 진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 때가 마을어른 즉 집안의 어른을 중심으로 마을의 공동체적 삶이 가장 번성했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처럼 한 때 달천마을 주민의 60% 이상을 차지했던 학성 이씨들도 1945년 광복과 6·25사변 등을 거치면서 마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조금씩 얕아졌다고 한다.

 특히 62년 울산이 공업도시로서 시로 승격되면서 마을 사람들이 조금씩 빠져나가기 시작한 것으로 전했다.

 그러나 공업도시로서의 울산이 팽창하면서 공장부지가 모자라 마을 인근의 구릉은 100개 가까운 공장들이 터를 잡은 농공단지로 변했다.

 하천을 따라 호계로 향하는 길과 중구 성안동으로 가는 길은 어느새 왕복 2차선으로 넓어져 아스팔트로 포장돼 말끔하게 변했다.

 길이 변한 것과 함께 집들도 이제는 기와 대신 슬라브를 이은 현대식 주택들이 마을 곳곳에 터를 잡아 깨끗한 인상을 방문자에게 주고 있다.

 또 마을회관과 교회를 제외하고는 낮은 구릉들에 둥글게 싸여 있는 달천마을은 대부분의 집들이 단층구조로 옹기종기 모여 있어 한층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제 달천마을 앞에 농공단지가 들어서고 또 현재 대규모 아파트가 공사중이어서 조만간 달천마을의 모습도 많이 바뀌게 될 것으로 보인다.

 달천마을은 도심에서 교통이 어렵지 않을 뿐더러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도 그리 험하지 않아 전원을 꿈꾸는 도시민들이 많이 찾고 있기 때문이다.

 학성이씨대문회장, 북구향토문화연구회장 등으로 활발히 활동중인 이채형씨는 "제실을 중심으로 성씨들이 모여 있는 모습을 어렵겠지만 그래도 오랫동안 가꿔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며 문중에 대한 강한 애정을 보였다. 서찬수기자 sgij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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