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 사회는 심각한 갈등과 혼란 속에 있다. 생각을 담아내는 그릇인 말로인한 화를 당하고 있는 셈이다. 글 때문에 오는 화를 필화라고 하면, 말로 인하여 혼란과 갈등을 겪고 있으니 설화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대체로 두 방향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불과 넉 달 남짓 전에 사람들이 하던 말과 지금의 말이 극과 극으로 다르니 어느 것이 그들의 진심인지 혼란스럽다는 것이다. 그때 그 말을 믿고 마음을 주었는데 태도가 돌변했으니 배신감을 지울 수 없다고 흥분할 수 밖에 없다. 반면 그 때의 말에 치명타를 입고 아직 제 몸도 추스리지 못하고 있는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지금에라도 제대로 정신이 돌아와 바르게 말하니 잘 된 일이 아니냐고 두둔하고 있다. 두 편이 입장이 뒤바뀌어 갈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럴만하고도 주리가 남을 형편이다.

 "반미(反美) 좀 하면 어떠냐"에서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지금쯤은 정치범 수용소에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빨간색에서 보라색까지 끝에서 끝까지의 스펙트럼을 넘나들고 있으니 개혁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파격적이고 포용적이라 하기에는 너무 원칙 없는 일이 아닌가 싶다.

 하긴 누가 여러 달 뒤의 일까지 예측하고 말하고 행동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 이해못할 일도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정치인들에게서 듣고 공부 아닌 공부를 열심히 한 시류론, 대세론, 사정변경의 원칙을 익히 알고 있는데 무엇이 그다지 새삼스러워 이렇게 갈등하고 혼란스러운지, 오히려 의아스러울 지경이다.

 우리는 언제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그것을 지키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보편적인 힘을 법과 원칙이라고 믿고 있다. 법은 사회의 구성원들이 동의와 합의를 통하여 만들어낸 결과이다. 원칙이란 보통사람들의 경험과 상식에 따르는 행동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필연적으로 시간적 지속성과 논리적 일관성을 요구한다. 새로운 동의나 합의가 없었다면, 보통의 생각이 바뀔만한 혁명적인 일이 없었다면, 먼저 한 말과 행동은 놀랄 만큼 변하지 않는 것이 낫다. 역사성과 보편성이 없는 사회는 믿음을 담보할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사회를 뒤흔들고있는 북한 핵문제에 연계된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보면 법과 원칙의 소중함을 다시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이란 나라는 건국초기에서부터 오로지 강자의 법, 힘에 의한 정의가 법이자 원칙이 되어온 나라이다. 서부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수만 년 아메리카 대륙의 주인으로 살아온 인디언들을 핍박과 살육으로 멸망시킨 그들의 미국정신은 오늘날 평화의 파수꾼 역할을 명분으로 삼아 세계 곳곳에서 힘의 정의, 강자의 법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서부영화에서 존 웨인이 인디언들에게 평화를 외치면서도 어디 단 한 뼘의 땅에서라도 그들만의 평화를 누리며 살도록 두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뿌리깊은 오만이다.

 요사이 알만한 이들이 하는 말들 가운데 극단적 제국주의와 극단적 민족주의는 적대적 공존관계라는 의미 깊은 말이 오가고 있다. 힘으로 세계를 지배하고자 한다면 제국주의와 다르지 않을 것이며, 세계와 더불어 함께 살고자 아니하고 피붙이만 싸고돌면 편협된 민족주의로 힐난을 받을 것이다. 편견을 넘어서 실상을 인정하고, 오만을 거두고 약자의 자존심도 인정하겠다는 오만과 편견의 대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편견을 강요하지 말고, 그렇다고 돌변하여 줏대없이 흔들리지도 말고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설화는 또 다른 말로 인한 화를 부르기 쉽다. 존 웨인은 뒤에서 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다시 사정 바뀌었다고 다르게 말하지 않고 약속대로 할 일이다. 그리고 우리 보통시민들은 정치인, 특히 최고권력자에게는 무한 책임을 바라고 아울러 보다 멀리까지 보고 행동하는 지혜와 통찰까지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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