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북면 거리(巨里) 동뫼산

거리는 울주군 상북면 13개 동리의 하나로 토박이말로는 "엥기"라고 부른다. 신라 때부터 불러온 이름이었으나, 부르기에 좋지 않고 그 후 인구도 많아져서 면내에서 가장 큰 마을이라 하여 "거리"로 고쳐 불렀다. 거리는 냇가를 뜻하는 "걸"을 소리 나는 대로 옮겨 적은 것으로 볼 수 있다.

 거리의 맨 동쪽 하동(下洞)마을 앞에는 조그마한 야산이 하나 있는데, 마을 한 가운데 있다고 하여 "동뫼(洞山)"라고 불러 왔다. 한편 "독뫼산(獨山)"으로도 쓰고 있는데, 밀양에서 옮겨온 산으로 알려져 있다.

 예로부터 울산과 언양은 왜구들의 침입이 잦아 방어를 위한 성이 필요했다. 어느 해 언양에서 성을 쌓는 공사를 하게 됐다. 공사 규모가 커 부역이 몇 해를 두고 계속됐고 원근의 사람들을 동원하게 되면서 밀양사람들까지 징발하게 되었다. 이처럼 부역이 과중하게 되자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항간에는 큰 원성이 자자하게 일어났다. 그러던 중 마침 밀양 고을에 있던 마고할미가 이 소식을 들었고, 언양 고을 백성들을 가엾게 여긴 그녀는 고통을 없애주려고 밀양에 있는 산을 치마폭에 담아 고헌산을 넘어 이곳 하동 앞에까지 와서 한숨을 돌리고 있었다. 이 때 마침 성역을 끝내고 돌아오는 장정들을 만났고, 마고할미는 뽑아 오던 산을 밀양으로 도로 가져가기도 그렇고 해서 그냥 내려놓고 가버렸다. 그때부터 이 산을 "동뫼" 또는 "밀양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한다.

 이 동뫼(밀양산)에 묘를 드리기만 하면 마을에 큰 해가 일어났다. 그래서 몰래 암장한 묘를 들어내 멀리 갖다 버리면 마을은 다시 평화로워 졌다 한다. 때문에 마을사람들은 누군가 몰래 묘를 쓸 것을 우려한 나머지 동뫼에서는 매장을 하지 못하도록 금장지(禁葬地)로 정해 감시를 하곤 했다. 그러다 한번은 상북면 지화리에 살던 마을 유지 동래 정씨(정심의 후손)가 동뫼에 묘를 쓰려 하자 마을사람들이 들고 일어나 묘를 쓰지 못하게 했다. 이에 동래 정씨는 꾀를 내어 본래 이 산이 밀양의 산이었던 점을 들어 밀양 부사에게 산세(山稅)를 내고 장지(葬地) 허가를 받아왔다. 밀양 부사가 발행한 매장 허가서를 내놓자 마을 사람들도 막을 길이 없어 동래 정씨는 여기에 묘를 썼다. 이 후 재산이 일고 인재도 배출되었으나 예상했던 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전에 묘를 써 마을에 화를 불러일으킨 것은 산주인 마고할미에게 세금을 내지 않아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믿게 되었다 한다.

 마고할미는 여신이다. 이 마고할미는 세상 창조에 대한 우리 민족의 설화에 거대한 여신의 이미지로 등장하곤 하는데, 한라산을 베고 누워 한 다리는 서해에, 또 한 다리는 동해에 두고 손으로 땅을 훑어 산과 강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마고할미가 종종 익살스럽고 천진한 행동을 하는데, 이 때도 백성들이 고생하는 모습을 보고 도우려고 했던 것 같다.

 만약 동뫼산을 밀양관할의 세원(稅源)으로 분류한다면 마고할미는 울산의 편을 들까 밀양에 손을 들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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