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촌동(明村洞)은 본래 울주군 하부면 지역으로, 독도동·대도동·평촌동 일부를 병합하여 하상면에 편입됐다가, 1962년 다시 울산시에 편입돼 명촌동이 되었다. 처음 이름은 평야에 있다 하여 평촌(平村)이라 했는데 일제 때 명촌으로 바꾸었다.

 고려 충숙왕 9년(1322) 무렵 이 곳 무룡산 서쪽 기슭 낮은 구릉 위에 사람처럼 서 있는 바위 하나가 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옥정(玉井)이란 우물이 있었는데, 하루는 이 바위 위에 흰 연꽃무늬가 나타나면서 주위에 서기(瑞氣)가 비쳐 이 때부터 이 바위를 백련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련암 군자정에 대해 여러 시문(詩文)에서 전하고 있는데, 특히 충혜왕 복위(1340~1344) 때에 울주에 귀양 온 운곡 (雲谷) 정포(鄭?)의 시가 빼어나다. 또한 중종 27년(1532) 8월에는 옥정에 연꽃이 피어 겨울에도 시들지 않고 그대로 넘기니, 이 소문이 전국에 널리 퍼져 시인 묵객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연산군 4년(1498) 무오사화 때는 아버지 준손(駿孫)과 함께 호남지방에 유배됐던 김대유(金大有)가 중종 원년(1506)에 풀려나 옥정 옆에 군자정(君子亭)을 세우고 삼족당(三足堂)이란 현판을 붙여 스스로 당호(堂號)로 삼아 "군자정기"를 써서 걸었다. 이 기(記)가 명문이라 군자정은 더욱 유명해졌고 문학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삼족당은 청도 출신으로 연산 무오년 사초(史草)문제로 사형된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인데, 숙부의 사건에 그의 부자가 연좌되었던 것이다.

 백련암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고 과객들이 모여들자, 이곳의 어느 욕심 많은 벼락부자가 이를 귀찮게 여겨 쇠망치로 이 바위를 산산이 깨뜨리고 옥정에 뿌리내린 백련도 뽑아버렸다. 그 뒤 이 소문이 퍼지자 탐승객들의 발자취는 끊기고 그의 가세 또한 날로 내려앉아 결국 망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백련암, 옥정, 연꽃, 그 어느 것도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다만 백련암과 군자정, 그리고 이곳에 관한 명사들의 시와 글이 면면(綿綿)히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요즘 인기리에 상영중인 영화 "살인의 추억"은 화성 연쇄살인이라는 실화를 소재로 하고 있다. 이런 내용이 알려지자 매스컴에서 앞 다투어 현지에 찾아와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취재하고 있고 호기심 많은 일반인들도 분주히 오가고 있는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바쁜 일상 속에서 반갑지 않은 일로 인해 번거롭기도 하거니와 무엇보다도 잊혀져 가는 아픈 상처를 자꾸 들쑤시는 것 같아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고 있다. 화성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염려하는 것일 것이다.

 세월이 흐르기는 했으나 그 사건은 반드시 끝을 보아야겠기에, 그나마 몇 군데 남지 않은 범죄현장에 대해 화난 주민들의 화풀이가 없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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