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모 일간지로부터 현 정부에 관한 의견조사를 의뢰받았다. 여러 문항에 답을 하고 있다보니 참으로 많은 문제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실감하였다. 현 정부로서는 남다른 기대와 희망을 안고 출발했지만 이라크전이나 북핵문제 등 굵직한 대외문제에 직면한데다 이상적인 부동산버블은 국내의 경제 분야에 어두운 시나리오를 던져주는 몇 달 이었던 것 같다.

 이런 대내외적 문제가 다시 화물연대파업에 이어 계속되는 레미콘, 버스 등의 연이은 운수업체 파업으로 치달을 가능성이 우려되는 가운데, 운수업계 사업자들은 폐업까지도 고려하고 있다는 소리도 들려 우리들을 우울하게 하고 있다. 심상치 않은 부동산거품경기의 이상기운과 함께 제2금융업계의 구조조정이 주는 여파도 심각할 것으로 예상돼, 이러한 불안함이 사회 곳곳의 갈등을 가속화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역주민을 위시한 시민모두가 주체가 되어 민주적인 통치구도로 전환할 수 있는 시민참여구조를 구축하겠다는 참여정부의 이상은 파업과 갈등구조속의 참여로 나타나는 아이러니로 속출하는 것이 안타깝다. 질서와 안정은 방치되고 갈등과 대립만 들끓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흑백논리에 입각해서 억압적으로 선택을 강요하는 식으로 해결해버리는 방식은 어쩌면 우리가 익숙한 방식이기도 하고, 가장 명확하고 간단한 해결방식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즈음의 문제해결 방식은 좀 다른 것 같다. 문제는 명확한 반면 어떤 식으로 해결되더라도 또 다른 한 쪽의 주장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한다. 이러한 해결구조는 일견 상당히 혼란스럽고 무질서해 보일지도 모른다. 역설적으로 들릴지는 모르지만 이런 혼란이 오히려 문제를 보다 더 명확하게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래 사회문제라고 하는 것은 시비의 경계자체가 불명확할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논리가 절대적으로 타당하다고 결론짓기 힘든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갈등과 대립 현상자체만을 무마하기 급급하여 쌍방의 논리가 충분히 거론되고 검토되기도 전에 단기간에 결론지어 버리는 것은 오히려 문제해결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때로는 권위주의적 통치에 의한 해결방식이 오히려 편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린다. 그편이 이해관계가 적은 사람들에게는 편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자신이 불이익을 당하고 이해관계가 걸려있을 때 소수의 권위에 의해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할 수 있는 공간조차도 허용되지 않는 현실에 대해 경악해 한다. 따라서 문제가 극으로 진전하기 전까지는 갈등으로 표출되기 힘들기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문제가 보이지 않다가 일단 갈등이 표출되는 시점에서는 극적인 해결방식이 도입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이에 반해 다수가 참여하고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는 해결방식은 문제의 발생당시부터 갈등으로 표면화되는 경우가 많고, 또한 각각의 논리나 주장도 수렴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일상적으로는 갈등 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처음부터 갈등이 표면화되어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대립하고 완화해가는 과정을 겪기 때문에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이 과정에는 명확한 주체로서의 원칙과 일관성이 요구되며 그 원칙에 입각하여 치열하게 대립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일정한 합의에 도달하면 그 합의한 결과를 수용할 수 있는 소양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경제문제를 비롯하여 대미외교문제, 그리고 교육행정 등 각양각색의 갈등이 표면화 되고 있으며, 해결과정도 그렇게 산뜻하지는 않은 결과를 가져온 것도 많다고 판단된다. 그러나 문제의 소재는 일상적인 갈등이 빈번하다는 사실에 있다기보다는 그러한 갈등에 대하여 현 정부가 납득할 만한 원칙과 일관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라고 본다. 또한 문제를 보다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여유를 가질 때 생산적인 대안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대안제시를 전제로 해야만 비로소 비판은 의미를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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