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내 눈치를 피해
가계부를 쓴다
바스락바스락 아랫입술을 뜯어
밀랍의 성(城)을 쌓는다

막아도 막아도
자꾸 껴드는 바람
막다 막다 지친 아내는
잠이 들고

그 옆
쪽불을 밝힌 내가
시를 쓴다

눈물이 채 마르지 않은
밀랍 속으로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밤새워
단물을 빤다.

■ 정소슬 시인은

1957년 울산 출생. 2002년 시집 ‘흘러가는 것이 어디 강물뿐이랴’로 문학 활동을 시작. 2006년 두 번째 시집 ‘내 속에 너를 가두고’를 출간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 시 계간지 ‘주변인과 시’ 운영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먼저 말을 한다. 흘리는 눈물의 대부분은 돈과 관련되어 있다.

▲ 이기철 시인

딱히 쓸 것도 없는 ‘가계부’. ‘아랫입술을 뜯어가며’ 계산기 두드려 보아도 생활은 날마다 적자다.

‘막다 막다 지친’ 아내의 안쓰런 잠듦에 시인은 그제서야 ‘쪽불’을 밝힌다. 시 한편이 밥 한 그릇에 미치려면 참 아득하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펜을 꺽으면 자신도 석죽을 것이란 사실이 명백함으로 오히려 ‘펜촉을 꾹꾹 눌러가며’ 삶의 적자를 메우는 중이다.

시인(詩人)도 시인(時人)이어야 함으로 현실에서 자유롭지 못한 슬픔이 있다. 하여 시를 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기철 시인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